때때로 감각은 기억을 지배하기도 하고, 끝의 감각이 전체의 감각을 대신하기도 한다. 곧 우리 기억에는 특별한 끝의 감각으로 '유종의 미' 혹은 '전체보다 나은 마무리'로 기억에 남은 영화들이 있다. 그중 유독 엔딩 장면의 음악이나 엔딩 크레딧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많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는 시청각을 동시에 활용하는 매체이지만, 보다 추상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 청각이며, 시각적 잔상보다 청각적 잔향이 기억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여기 내 기억 속에 남은 몇 가지 엔딩 타이틀을 적어본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영화들이다.

 

갱스터 장르의 황혼

<좋은 친구들> 엔딩 신 스틸컷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1990)에서는 당대 위대한 3부작 여정의 마침표를 준비하던 <대부> 시리즈와는 또 다른 마피아 세계의 일면을 현실적이고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면이 엔딩 크레딧으로 채 바뀌기 전에 오버랩되는 시드 비셔스의 'My Way'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비장하고 아름다운 원곡을, 1970년대 영국 펑크록의 얼굴마담이자 악동의 상징이었던 시드 비셔스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리메이크한 이 노래를 엔딩 타이틀로 삽입함으로써, 영화는 앞선 스토리에 대한 완벽한 주석을 더한다.

영화 <그레이트 록 앤 스윈들>(The Great Rock 'n' Roll Swindle, 1980)의 한 장면. 실제 시드 비셔스가 부르는 ‘My Way’를 들을 수 있다

그간 무겁고 장엄했던 갱스터 영화의 장르성을 개성 있게 비틀며 갱스터 장르의 황혼을 장식했던 영화들도 떠오른다. <레옹>(1995)에서 소녀 마틸다의 마지막 대사 위로 흘러나와 버즈아이 뷰(Bird's-eye view)로 멀어지며 서정적인 선율과 보컬을 더하는 스팅의 'Shape of My Heart'는 1990년대 가장 유명한 엔딩 타이틀 중 하나일 것이다. <저수지의 개들>(1992) 엔딩 크레딧에 흘러나온 해리 닐슨의 'Coconut'도 빼놓을 수 없다. 경쾌한 리듬과 사운드에 마약이라도 한 듯한 뮤직비디오 영상을 보여주는 이 노래는, 영화의 긴장감 넘치고 장렬한 결말에 뒤이어 등장함으로써 본작으로 데뷔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타일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Sting 'Shape of My Heart' with Lyrics

 

고독한 음악가

<글렌 굴드에 관한 32가지 이야기> 포스터

고독한 천재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1990년대를 사로잡았던 중요한 주제다. 글렌 굴드는 늘 구부정한 자세로 허밍을 하며 연주하거나 허공에서 손이 노니는 등 기괴하고 특이하지만 그 예술적 도취가 한편으로 매력적이기 그지없었던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전기가 단편들로 뒤죽박죽 엮인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 이야기>(1993)는, J.S. 바흐 최대의 걸작 중 하나이자 글렌 굴드가 영화 속 이야기처럼 단편 스케치로 남긴 <푸가의 기법> ‘제9곡’을 엔딩 크레딧에 실어 그의 연주를 아는 이에게 한동안 진한 감상의 여운을 선사했다.

<글렌 굴드에 관한 32가지 이야기> 예고편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숨겨진 삶을 각색한 <힐러리와 재키>(1998)에는 자클린 42년 생애 가장 유명한 연주로 남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그러나 앞서 자클린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장면이나 고통 속에 있을 때보다, 마지막 자클린이 어린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장면에서 음악이 더욱 간절하게 와닿는 것은 영화가 다 모사할 수 없는 현실 속 자클린의 사연과 감정을 상상이 대신 채워 주기 때문이다. <서편제>(1993) 엔딩 장면 속 가사 한 줄 없는 무명의 ‘구음 시나위’가 주인공 송화의 ‘한’을 대신 전달해주듯 말이다.

<서편제> 예고편.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서편제>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중경삼림> 스틸컷

대체로 아름다운 슬픔은 그 어떤 환희보다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1997) 속 표정도 알 수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향해 거칠게 내던져지는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는,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영화가 달려왔다는 듯 보는 이의 가슴에 깊은 비수를 꽂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보다 잔잔하지만 더욱 묵직한 슬픔을 선사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들려오는 '8월의 크리스마스'는 배우 한석규가 그만의 담백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직접 불러 영화가 다 전하지 못한 진심과 뒷이야기를 대체하는 것만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 뮤직비디오

현대인의 무기력한 고독을 아름다운 인연의 실마리로 끝맺는 <중경삼림>(1994) 속 ‘梦中人(몽중인)’이나 <접속>(1997)의 ‘Lover’s Concerto’ 역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기억이다.

왕비(王菲) ‘梦中人’ 뮤직비디오

 

세기말의 우울

<아메리칸 뷰티> 스틸컷

내가 가장 사랑하는 1990년대 영화 엔딩 타이틀은 대부분 세기말의 우울이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작품들 속에 주로 등장한다. <매트릭스>(1999) 정도는 그나마 밝은 축에 속한다. 작품은 암울한 디스토피아 배경 속에 심오한 철학을 담아냈지만, 과장된 톤과 만화적인 액션이 최적의 박진감을 선사한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하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Wake Up’이 절묘한 까닭이다. <파이트 클럽>(1999) 엔딩 장면 속 픽시스의 ‘Where Is My Mind’는 비슷한 이유로 적절하지만 동시에 뜻밖의 장면과 교차해 충격적이고 기묘한 뒷맛까지 있다.

픽시스(Pixies) 'Where Is My Mind' 뮤직비디오

굳이 뒷골목 세계의 비범한 이야기나 로맨틱한 백일몽, 판타지 스토리의 환상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네 일상의 욕망과 그에 대한 좌절을 완벽하게 그려낸 작품이 있다면 바로 <아메리칸 뷰티>(1999)일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그린 이 블랙코미디 속 주인공의 허무와 마지막 깨달음을 동시에 관통하는 엔딩 크레딧 노래 ‘Because’는, 비틀스 원곡의 시적 가사에 더해 노래를 리메이크한 엘리엇 스미스 특유의 스러질 듯 처연하고 아름다운 보컬, 그리고 이 영화 이후 4년 만에 실제로 세상을 떠난 엘리엇 스미스의 사연 등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 절대로 잊히지 않는 엔딩 타이틀로 남아 있다.

<아메리칸 뷰티> OST 'Because'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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