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넬로페 크루즈(이하 ‘페넬로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는가. 화려한 외모의 관능적인 배우 겸 모델 혹은 스페인이 낳은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로 흔히 인식되지만,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등 각종 연기상을 섭렵한 엄연한 연기파 배우이다. 더구나 그는 데뷔부터 지금에 이르는 30년 남짓 고상하고 우아한 온실 속 난초이기보다 늘 몸을 사리지 않는 배역으로 자신만의 들꽃을 연기해왔다.

 

미(美)와 성(性)의 굴레

들꽃이라는 표현처럼 페넬로페의 연기 인생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타고난 외모와 일찌감치 갖춘 연기력 덕에 만 16세의 어린 나이로 영화의 메인 역할을 맡게 되지만, 당시 <하몽 하몽>(1992)에서 페넬로페가 연기한 실비아는 팬티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매춘술집의 딸(국내상영시 조카)이자 공장사장과 그의 아들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서슴없이 가슴을 노출하는 캐릭터였다. 10대의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 영화로 일약 스페인 섹스 심벌로 떠올랐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한동안 정사신이나 노출연기는 물론이고 키스신조차 거부할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하몽 하몽> 국내 포스터

이후 그는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여배우라는 굴레 탓에 때로는 누군가의 꿈의 여신, 때로는 욕정의 대상이 되어 끊임없이 옷을 벗어야 했다. 훗날 페넬로페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네가 오로지 외모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이후 진지한 배우가 되는 것이다. 일단 ‘예쁜 여자’으로 알려지고 나면 아무도 너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오픈 유어 아이즈>(1997)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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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생의 개척자

그 와중에도 페넬로페는 자신의 넘치는 열정에 부합하는 캐릭터를 찾고 연기하고자 분투했다. 수동적이거나 전형적인 미녀 역할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인 연기를 소화했다. <로마 위드 러브>(2012) 속 매춘부 역의 페넬로페는 단순한 매춘부가 아닌 뜻하지 않게 낯선 이의 거짓 아내 행세를 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제 할 말과 가치관을 설파하는 능동적인 인물이다. <러브 인 클라우즈>(2004)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에서는 뻔한 삼각관계의 꼭지점이 될 때에도 그는 여자의 마음까지 빼앗는 흔치 않는 뮤즈가 된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스틸컷. 이 영화로 페넬로페는 2009년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스페인 배우로는 두 번째, 스페인 여자배우로서는 첫 번째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이었다. 이때 남우조연상 수상자는 이미 작고한 히스 레저였다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페넬로페의 연기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에게 더욱 치열한 캐릭터를 부과한다. <라이브 플래쉬>(1997) 속 20대의 페넬로페는 단 몇 분 출연했을 뿐이지만, 무능하고 암울한 독재정권 하의 어린 창부이자 임산부로서 버스에서 처절하게 주인공을 낳는 것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는 역할의 깊이와 비극성이 심화된다. 에이즈에 걸린 복장도착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의 하룻밤 정사로 아이와 병을 동시에 얻게 된 수녀 역할을 맡는다. <귀향>(2006)에서의 투박하고 강인한 어머니상은 어떤가. 이는 그동안 페넬로페가 ‘어머니’ 아니면 ‘매춘부’라는 역할에 한정되어 왔던 뼈있는 현실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반대로 그가 단지 국한된 역할이 아닌 삶에 생동을 불어넣는 주동적인 인물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귀향>으로 페넬로페는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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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혹은 투사

바람 잘 날 없는 들판, 곧 고통으로 가득한 생의 중심 속에서도 페넬로페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결코 만만히 도망가는 법이 없다. <아름다운 시절>(1992)이나 <러브 인 클라우즈>(2004)처럼 스페인 내전을 전후한 시기나 <코렐리의 만돌린>(2001)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통과하면서도, 앞서 치열한 개인의 생을 개척해갔던 모습처럼 적당히 타협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그 속에 뛰어들곤 하는 것이다. 연기자 페넬로페에게 휘황찬란한 귀족 드레스보다 누더기 앞치마가 더 어울리고, 단정한 머리보다 헝클어진 머리가 훨씬 익숙한 것도 그와 같은 까닭이다. 은행가의 딸보다 농가의 딸(<밴디다스>(2006))이 어울리고 정신병원의 의사보다 환자(<고티카>(2003))에 더 어울리는 이유다. 하다 못해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2011), <쥬랜더 리턴즈>(2016)와 같은 모험물, 코미디에서조차 그는 구해져야 할 대상이 아닌 스스로 싸워야 할 투사이고 해적이며 요원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스틸컷

 

내일의 안녕, 내일의 페넬로페 크루즈

<내일의 안녕> 스틸컷

마치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햇살과 정열을 홀로 대표하는 듯한 페넬로페의 강렬한 눈빛과 괄괄한 목소리가 눈과 귀에 선하다. 근래에 개봉한 <내일의 안녕>(2015)을 비롯해 늘 작업을 쉬지 않는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의 연기가 궁금하고 그리운 까닭이다. (<내일의 안녕>에서도 페넬로페는 무거운 삶을 지고 가는 시한부 인생을 연기한다.)

<내일의 안녕>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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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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