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이지미 출처 - 마크 퀸의 'Flesh paintings' Via marcquinn.com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현대예술에서, 시각적 쾌적함 만을 좇으려는 건 무모한 시도다.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던 예술가의 관심이 점차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대예술은 예술가의 철학을 드러내는, ‘개념으로서의 예술’로 정립되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해 나갔다. 작품의 재료나 표현 방법의 범위 역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어졌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나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 같은, 예술가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작품의 재료로 활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재료를 사용하는 예술가들도 등장했다. 자신의 피와 살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4.5리터의 피로 만든 두상

마크 퀸(Marc Quinn)

Via myartguides.com

마크 퀸은 동시대 예술가다.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과 함께 영국 작가 집단 YBA(Young British Artists)를 대표하는 작가다. 196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예술사를 전공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렀다. 마크 퀸의 예술적 관심사는 바로 ‘생명’이다. 그는 데뷔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탄생과 소멸에 관해, 예술적 상상 속에서 변형될 수 있는 신체에 대해 줄곧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팔다리가 기형인 병을 안고 사는 영국 작가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를 모티프로 한 ‘Breath’(2012) Via marcquinn.com 
배우 케이트 모스가 요가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Sphinx’(2006) Via marcquinn.com  
자신의 아들을 모티프 삼아 만든 갓난아기 조각 ‘Planet’(2013) Via marcquinn.com 

 

캠브리지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할 당시만 하더라도, 마크 퀸은 그저 많고 많은 젊은 작가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다 1991년, ‘Self’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예술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Self’는 마크 퀸의 피로 완성된 작품이다. 마크 퀸은 4.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후, 두상 모양으로 냉동시켜 미술관에 전시했다. ‘Self’를 완성한 이후에도 그는 틈틈이 피를 뽑아 모아두었다가 5년을 주기로 같은 작품을 추가로 더 만들었다. 영국 런던의 사치갤러리는 그의 두 번째 피 두상을 한때 소장했는데, 청소부의 실수로 작품이 훼손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냉동 상태에서만 완전한 ‘Self’는 조금만 위해를 가해도 금방 무너져버리는, 생명의 나약함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기억됐다.

마크 퀸이 자신의 피를 얼려 만든 피 두상 ‘Self’ Via designgallerist.com 

 

칼자국이 종횡하는 신체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 

Via designapplause.com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이하 ‘사그마이스터’)는 그 자신이 쓰는 사무실마저 유명한 디자이너 겸 예술가다. 비싼 프로젝트라도 내키지 않으면 거절하고, 때로는 무보수로 일하면서까지 초창기의 작은 사무실 규모를 유지하는 기행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961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후, 1993년부터 지금까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포스터 디자인, 각종 캠페인, 앨범 아트워크, 거리 퍼포먼스 등 디자인과 예술을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뉴욕 다이치갤러리에 전시된 바나나 벽 ‘Self-Confidence Produces Fine Results’(2008). 노란색 바나나와 초록색 바나나를 조합해 만든 후, 약 3주간 작품이 변색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Via aiga.org 
3주 뒤 변색되어 글자의 형태가 사라진 바나나 벽 Via ad110.com 
루 리드 앨범 <Set the Twilight Reeling> 포스터 디자인. 얼굴 위를 덮은 것은 앨범 수록 곡 가사다
사진 속 음식들을 다 먹고 일주일 만에 약 11킬로그램으로 불어버린 몸을 촬영한 포스터 ‘GGG-DDD’(2003) Via designboom.com

 

사그마이스터는 기발하고도 기이한, 유머러스하고도 풍자적인 작품을 줄곧 선보여왔다. 그중에서도 1999년에 발표한 작품 ‘AIGA Lecture Poster’는 ‘역대 가장 충격적인 포스터’로 남았다. 당시 사그마이스터는 미국그래픽디자인협회(AIGA)의 요청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조수에게 칼 한 자루를 쥐여 주곤 자신의 몸을 긁어 글자를 새기라고 지시했다. 조수는 사그마이스터의 가슴, 배, 팔 등 상반신의 모든 부위에 걸쳐 글자를 새겼고, 칼이 스쳐 간 자리는 피딱지와 함께 난잡한 상흔으로 남았다. 사그마이스터의 몸에 남은 생채기는 예술가가 겪어야만 하는 창작적 고통에 대한 은유였다. 퍼포먼스 이후 몸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몇 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피부를 난도질해 만든 ‘AIGA Lecture Poster’(1999) Via designboom.com 

 

폭력과 사랑으로 그리는 자유의 세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 

Via dazeddigital.com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이하 ‘아브라모비치’)는 극단적인 퍼포먼스로 주목받아 온 행위예술가다. 공산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학살당한 할아버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르티잔(빨치산)으로 활동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특수한 성장 배경을 고스란히 예술세계에 담았다. 생명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사랑과 이별, 억압과 반항을 주제로 한 예술은 종종 자학적인 행위로 완성되곤 했다. 1974년에 했던 ‘Rhythm, 0’는 대표적인 퍼포먼스다.

아브라모비치는 전시장에 관객들을 불러 세워놓은 후, “테이블 위에 있는 72개의 물건을 내 몸 위에 마음대로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관객들은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예술가의 몸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아브라모비치는 퍼포먼스를 하는 6시간 동안 관객에 의해 옷이 벗겨졌고, 관객이 찌른 칼에 상처를 입었으며, 관객이 물려준 담배를 물었고, 관객이 겨눈 총구와 대면해야 했다. 예술가의 몸은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에는 오직 완벽한 오브제로서만 기능했으며,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야 다시 생명을 가진 신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리아 아브라모비치가 1974년에 했던 퍼포먼스 ‘Rhythm, 0’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장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기억되곤 한다 Via lonewolfmag.com 

 

아브라모비치가 이렇게 극단적인 행위예술만을 선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6년에 처음 만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랑한 연인 울라이는 그의 작품에 몇 번이고 등장했다. 그와 함께 한 시간, 그리고 헤어짐의 순간을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예술로써 박제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그의 연인 울라이와 함께 한 퍼포먼스. 두 사람의 움직임이 조금만 틀어져도 화살은 어김없이 아브라모비치의 몸을 향하게 되어 있다 Via theguardian.com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다른 퍼포먼스에도 함께한 연인 울라이 ‘Relation in Time (With Ulay)’(1977) Via dazeddigital.com

 연인 울라이와 헤어지고 20년쯤 지난 2010년, 아브라모비치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퍼포먼스인 ‘The Artist Is Present’를 감행했다. 원하는 이는 누구든 아브라모비치의 맞은편에 앉아 1분 동안 그녀의 눈을 말없이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대화 없이 오직 시선만으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퍼포먼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흰 수염이 난 남자가 아브라모비치의 맞은편에 앉았다. 30년 전 사랑했고 20년 전 헤어졌던 자신의 연인, 바로 울라이였다. 울라이와 마주한 아브라모비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냈다. ‘The Artist Is Present’는 예술로 승화된 ‘사랑과 이별’이라는 귀결로써 많은 이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행위예술 ‘The Artist is Present’에서 헤어진 옛 연인과 조우한 아브라모비치. 울라이는 1분15초 무렵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