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작곡가다. 음악에 관한 작업이라면 참여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여러 영역에서 활동했다. 오페라, 협주곡, 실내악, 독주곡 등 클래식의 범주에 있는 음악에서부터 영화음악, 월드뮤직, 발레 음악, 합창 같은 동시대 음악까지, 그가 남긴 음악적 자취와 업적은 모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다. 클래식 음악과 현대음악의 기반 위에서 자신만의 경지를 이룩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 평가받는 필립 글래스를 소개한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적 서사, 미니멀리즘

필립 글래스 피아노 솔로 음반에 수록된 ‘Mad Rush’

필립 글래스(이하 ‘글래스’)는 소위 ‘미니멀리즘 작곡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미니멀리즘은 여러 예술 장르에 반영된 사조 중 하나로, 20세기 초 모더니즘 시대가 열리면서 등장했다. 글래스가 음악으로 구현하는 미니멀리즘은 ‘주제의 변형과 반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솔로 피아노곡인 ‘Mad Rush’를 들어보면 특정 주제와 멜로디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기본 요소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변화를 부여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변형’보다는 ‘반복’에 무게를 두고 흘러가는 음악이다. 그 증거는 음악의 곳곳에 드러나는데, 마치 문학의 수미쌍관처럼 동일한 구조를 이루는 도입부와 후반부의 멜로디가 대표적인 예다.

                                                                             

필립 글래스의 초기작 ‘Music in Twelve Parts’

사실 글래스는 정작 자신의 음악을 ‘미니멀리즘’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스승이었던 프랑스 작곡가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그리고 바흐, 슈베르트, 모짜르트 같은 작곡가에게 영향을 받아 만든 ‘고전주의 음악’에 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글래스가 1971년부터 4년 동안 작곡해 내놓은 연작 ‘Music in Twelve Parts’는 당시 유행하던 미니멀리즘 사조의 토대 위에서 완성된 곡이 분명하다. ‘열두 파트의 음악’이라는 뜻의 이 연작은 말 그대로 열두 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음악으로, 그 길이만 무려 세 시간 반에 달한다. 기승전결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음들이 동일한 구조위에서 반복적으로 흐른다. 여성 보컬, 신시사이저, 목관악기가 자아내는 선율은 단순하고도 독특한 화성을 바탕으로 쉴 틈 없이 반복된다. ‘Music in Twelve Parts’는 이후 미니멀리즘 음악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으며, 글래스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새로운 화성과 리듬을 개척한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서사를 파괴한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가진다.

글래스는 ‘Music in Twelve Parts’를 완성한 후, 기존의 규칙을 깬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해변의 아인슈타인>(Einstein on the Beach)은 그 시도 끝에 탄생한 곡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이야기가 예상되는 오페라이지만, 정작 오페라 속 아인슈타인은 무대위에서 잠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할 뿐이다. 대신 다른 가수들이 무대를 가득 메우며 군무와 노래를 선보인다. 그들은 ‘도, 레, 미, 파, 솔’과 ‘1, 2, 3, 4, 5’ 같은 의미 없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군무를 선보인다. 공통점이나 일관된 주제를 찾을 수 없는, 논리적인 해석이 무의미한 이 오페라는 훗날 뉴욕타임스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 평했을 정도로 현대 오페라의 혁명과도 같은 곡으로 남았다.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서사 없는 구조와 음악만큼이나 혁명적인 무대 연출을 보여준다 Via ceasefiremagazine.co.uk 

  

록에서 기인한 클래식, 데이빗 보위와 필립 글래스 

Via theguardian.com 

“워낙 다작하는 작곡가인 건 이미 유명한 얘기죠.” 영화감독 박찬욱은 한 인터뷰에서 글래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글래스의 다작 비결은 도전을 즐기는 타고난 기질, 자신만의 문법과 방식대로 음악을 창조해내는 재능을 기반으로 한다. 실내악곡, 관현악곡, 오페라 등 여러 장르에 걸쳐 꾸준히 작품을 남겨온 글래스는 1990년대 들어 교향곡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한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데이빗 보위에 영감을 받아 만든 교향곡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중 네 번째 곡인 ‘Heroes’는 데이빗 보위 원곡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작품이다. 원곡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글래스의 교향곡은, 록과는 다른 장르적 층위에서 원곡과 묘한 교집합을 가지며 전개된다.

 

필립 글래스의 영화 음악

글래스는 음악이라면 장르에 상관없이 도전했지만, 영화음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1980년대 초, 그의 친구로부터 영화음악을 요청받은 글래스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거듭된 설득 끝에 영화음악에도 발을 들였다. 1982년 첫 영화음악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4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 참여했다. 그의 영화음악은 이전에 이룩한 음악적 성취만큼이나 뛰어난 스코어로 평가받았다. 영화의 내러티브 만큼이나 극적으로 흐르는 글래스의 영화음악 대표작들을 차례로 감상해보자.

 

<코야니스카시>(Koyaanisqatsi, 1982)

<코야니스카시> 예고편

<코야니스카시>의 감독 갓프레이 레지오(Godfrey Reggio)는 자신이 연출할 영화의 음악을 위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를 소환한다. 바로 그의 오래된 친구 글래스였다. 글래스는 친구의 설득 끝에 합작 영화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코야니스카시>다. 이 영화는 경외심이 들게 하는 자연, 그 자연에 발을 들여놓은 인간의 도시문명을 오직 영상과 음악으로만 그려낸 작품이다. 산업사회의 무자비한 파괴성을 대자연의 모습과 교차시켜 보여준다. 대사가 의도적으로 배제된 자리는 ‘Koyaanisqatsi(균형 읾은 삶)’라는 가사가 반복해 등장하는 음악이 채운다. 세기말적 분위기까지 감도는 엄숙한 멜로디는 대자연과 도시문명 사이의 모순을 끄집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코야니스카시>는 시종 장엄하고도 무거운 선율이 반복되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OST가 흐른다

 

<쿤둔>(Kundun, 1997)

<쿤둔> 예고편

글래스는 초창기부터 비서구권 음악에 몰두했다. 티베트 불교와 인도 문화를 차츰 흡수한 후, 자신의 정체성을 동양 음악의 토대위에서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쿤둔>은 글래스의 음악적 지평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 중 하나다.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이 영화에는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티베트의 정치적 망명자이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필두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글래스는 티베트 악기를 이용해, ‘환생’이라는 영적인 소재를 영화음악으로 풀어냈다. 클래식에 주로 사용되는 악기와는 다른, 동양악기만의 신비한 소리가 영화의 시공간적 세팅을 더욱 현실감 있게 살려낸다.

<쿤둔>의 영화음악은 종교적인 색채와 영적인 기운으로 가득하다

 

<스토커>(Stoker, 2013)

<스토커> 예고편

<스토커>의 명장면이라 불리는 피아노 신은 글래스에 의해 탄생했다. 영화를 연출한 박찬욱은 이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평소 좋아했던 글래스에게 피아노곡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박찬욱의 영화를 알고 있던 글래스가 흔쾌히 수락하면서 피아노 신이 완성됐다. 글래스는 3분 남짓의 시퀀스를 절제되었으나 한편 극적이기도 한 음악으로 풀어냈다.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와 그의 삼촌인 ‘찰리’(매튜 구드)가 등장하는 피아노 신은 음악으로 은유하는 성애(性愛)나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음악은 고요하고 잔잔한 무드로 시작하지만, 이내 급박한 무드로 돌변해 절정을 맞는다. 열여덟 살 소녀의 우아하고도 비밀스러운 성장기가 글래스의 이 짧은 곡 안에 고스란히 응축된 셈이다.

<스토커>의 주제를 관통하는 피아노 신은 글래스의 음악으로 완성됐다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

<트루먼 쇼> 예고편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 미리 인사해 두죠.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좋은 밤 보내요.” TV 버라이어티 쇼 주인공이었던 ‘트루먼’(짐 캐리)은 이 말을 끝으로 무대 뒤로 사라진다. 오직 그 자신만 몰랐던, 이미 전 세계에 노출되어버린 삶을 벗어 던지고 카메라가 없는 삶을 찾아 떠난다. <트루먼 쇼>의 OST는 천성적으로는 쾌활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트루먼의 내면을 표현하는 장치로 활약한다. 매스미디어의 희생양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처지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삶의 찾아 떠나려는 트루먼의 욕망을 대변하기도 한다.

<트루먼 쇼>의 카메오로 출연한 글래스의 모습, TV 스튜디오의 피아노 연주자로 출연했다

 

<디 아워스>(The Hours, 2002)

<디 아워스> 예고편

<디 아워스>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1923년, 1951년 그리고 2001년을 살아가는 세 여자를 교차 편집 형식을 이용해 비춘다. 각 주인공 사이에 물리적으로 벌어져 있는 시공간은, 뒷 시대의 사람이 앞 시대 사람의 삶을 재현하는 듯한 구조로써 연결된다. 이 시공간의 틈을 더욱 좁혀주는 것이 바로 글래스의 음악이다. <디 아워스>의 OST는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글래스의 스코어이기도 하다. 시대와 배경만 다를 뿐, 인생을 살며 겪는 무게는 다를 바 없는 세 여인의 삶은 음악을 매개로 긴밀하게 이어진다. 각기 다른 시대를 넘나들며 여러 번 재생되는 글래스의 음악은, 시대는 달라도 정서적으로는 유사점을 가진 세 여인을 하나의 주제로 포섭되게끔 한다. 

<디 아워스>에 등장하는 필립 글래스의 피아노 솔로 음악 ‘Dead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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