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CG와 디지털 기술이 영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 일상과 다른 환상에 매료되고 압도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거대자본의 인력과 기술력에 힘입은 해외 애니메이션에 맞서, 수작업으로 소박하지만 예쁘게 그려내는 우리네 애니메이션 또한 존재한다. 안재훈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소나기>가 대표적이다.

 

<소나기>

The Showerㅣ2017ㅣ감독 안재훈 | 출연 노강민(소년), 신은수(소녀)

애니메이션 <소나기>의 원작 소설 <소나기>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자주 언급된다. 시골소년과 도시소녀의 순수하고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떠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이 있다. 우리 단편 문학의 그와 같은 힘을 믿어서일까. 안재훈 감독은 앞서 2012년에 발표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포함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엮은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2014년 공개하며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의 서막을 알린 바 있다.

<소나기>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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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The road called lifeㅣ2014ㅣ감독 안재훈, 한혜진ㅣ출연 장광, 남상일, 박영재, 이종혁, 엄상현
<메밀꽃 필 무렵> 스틸컷
<운수 좋은 날> 스틸컷

안재훈이 이처럼 단편 문학에 끌린 것은 그가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보다 먼저 접했던 ‘이야기’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에서였다. 실제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보면 원작에 충실한 스토리와 감성이 동화적인 그림체와 우리에게 익숙한 토속의 풍경들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나의 작품으로 이어진 서로 다른 세 가지 이야기가 각기 다른 채도와 정서의 온도로 그려지면서도, 이미 소설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의 이야기 속 정겨운 이웃처럼 다가올 것 같다. 소설이 낯선 이들에게도 이야기 속 과잉 없는 인류 보편의 서정은 공감대가 된다. 게다가 꼼꼼하게 그려낸 한국의 향토적인 풍경이 맑은 수채화의 한 장면처럼 선연한 빛과 고운 색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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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Green Daysㅣ2011 | 감독 안재훈, 한혜진 | 출연 박신혜, 송창의, 오연서, 서주애, 전혜영
<소중한 날의 꿈> 스틸컷

안재훈의 단편 문학 애니메이션화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2011년 공개한 <소중한 날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중한 날의 꿈>은 1970년대 군산을 배경으로 한 10대 소녀 이랑과 철수의 성장통을 그린 이야기로, 안재훈 감독이 오랫동안 써왔던 일기에 뿌리를 두고 출발한 이래 무려 11년 만에 완성되었다. 11년이라는 길고 힘든 여정을 그가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것이 소중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고 우리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는 앵커 손석희, 아나운서 박혜진, 전 축구감독 차범근, MC 배철수 같은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만든 주변 인물이 나오면서도 그들이 결코 이질감을 주지 않고 오리지널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던 것은 친숙한 이야기가 준 힘이다. <소중한 날의 꿈>은 지난날 비슷한 경험이나 꿈을 지녔던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렇게 안재훈의 꿈도 이루어지게 됐다.

<소중한 날의 꿈> 7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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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기쁨>

2000 | 감독 한혜진, 안재훈ㅣ27분
<순수한 기쁨> 전편보기

돌이켜 보면 안재훈은 그 이전부터 평범한 일상 속에 개인의 꿈을 녹여내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의 초창기 중편 애니메이션 <순수한 기쁨>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감독이기 전에 애니메이터로서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그림과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안재훈의 꿈이 주인공의 이야기에 투영돼 있다. 누군가에게 어느새 일상이 된 직업이지만 그 이전에는 분명 순수한 동기였을 ‘꿈’에 대한 주인공의 진지한 고민이 정교한 손 그림으로 묘사된다. 그가 차린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이름은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다.

<무녀도> 포스터

그렇게 <순수한 기쁨>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소년의 ‘하늘을 나는 꿈’이 가능한 현실로 일어난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역시 주인공 이랑과 말하지 못하는 철수네 삼촌이 밤하늘 달나라 인공위성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화석이 된 공룡을 불러내 함께 뛰어다니는 장면이 현실과 크나큰 거리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정밀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일상의 꿈이 먼데 있는 환상이 아닌 선명한 지척의 것으로 표현되어 더욱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전해준다. <소나기> 이후 완성과 공개를 앞둔 <무녀도>,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 등 안재훈 감독이 여전히 근대문학과 과거 소재를 놓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일상은 순전히 ‘현재’인 것 같지만 인식과 기억을 거치며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가 된다. 과거의 소중한 일상을 포착해 오늘의 꿈으로 완성하는 것, 그것이 안재훈 감독의 작품인 것이다.

 

Editor
Writer

차분한 즐거움을 좇는다. 그래서 보고 들은 것과 일상에 대한 좋은 생각,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옮긴다. 학부 시절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된 후 쓰기를 이어와 현재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웹진 <음악취향Y>, 잡지 <재즈피플>, 신문 <아주경제> 등에 글을 기고한다. 누구나 늘 즐겁기를 바란다. 너무 들뜨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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