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여년 전인 2008년 6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인근의 잉가로(Ingaroe) 섬 부근에서 당시 14세의 아들과 함께 스킨 스쿠버를 즐기던 한 남자가 실종되었다. 같이 갔던 스쿠버 강사와 동반자들은 인근 바다를 수색하던 중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긴급히 후송하였으나 끝내 숨지고 말았다. 사망자는 당시 44세의 나이로, 스웨덴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재즈 피아니스트 에스뵈욘 스벤숀이었다. 동시에 그는 유럽 최고의 재즈 트리오로 이름을 날린 E.S.T.(Esbjorn Svensson Trio)의 리더 겸 피아니스트였다.

에스뵈욘 스벤숀에 대한 추모 다큐멘터리 예고편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와 재즈 애호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클래식과 재즈 양쪽의 영향을 받은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는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하였다. 스톡홀름 왕립음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릴 적 친구인 마구누스 오스트롬(Magnus Öström, 드럼)과 함께 단 베르그룬트(Dan Berglund, 베이스)를 영입하여 재즈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한다. 마구누스는 록 밴드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어 록 드러밍을 즐겨 연주하였고, 단은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들 트리오의 음악에 영향을 끼친 뮤지션 셋을 꼽으라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LP)를 든다. 그렇게 자연스레 클래식, 재즈, 록이 믹스된 독특하고 미래 지향적인 음악이 만들어졌다.

재즈와 팝 차트에 오른 앨범 <Seven Days of Falling>(2003)의 타이틀곡과 'Elevation of Love'를 메들리로 연주하는 E.S.T.

1993년에 스톡홀름에서 결성된 E.S.T.는 점차 무대를 넓혀갔다. 1990년대 중반에는 노르딕 재즈(Nordic Jazz)의 정상에 올라섰고, 후반에는 유럽의 대표적인 재즈 트리오 반열에 올랐다. 2002년에는 9개월간 유럽, 미국, 일본 투어를 하면서 세계로 보폭을 넓혔다. 2006년에는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의 <Down Beat> 지에 유럽 재즈밴드 최초로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동시에 ‘Europe Invades!’라는 강렬한 카피와 함께 세계 정상급의 재즈 트리오임을 확인했다. 그가 사망하기 불과 1년 전이었다.

E.S.T.의 앨범은 대부분 창작곡으로 구성되며 작곡은 모두 에스뵈욘 스벤숀의 몫이었다. 자택에서 홀로 작곡 후 멤버들과 함께 어떻게 변화를 주고 즉흥성을 부여할지 협의했다. 하지만 앨범에는 멤버 모두의 공동 작곡으로 기재했다. 그는 작곡과 즉흥연주의 경계선이 현대 재즈로 올수록 희미해지는 추세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팝 뮤지션들이나 바흐 같은 클래식의 거장 또한 즉흥연주자라 할 수 있다. 교회 음악 또한 지금 듣는 멜로디로 정착되기 전까지 길고 긴 즉흥연주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내 말은, 작곡한다는 것은 즉흥연주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재즈는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우리의 연주를 무엇인가로 규정해야 한다면 아마 재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은 과거 기준의 재즈 정의와는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대로 연주할 뿐이다.”

현대 재즈의 거장인 팻 매스니, 마이클 브레커와 공연 중인 에스뵈욘 스벤숀(2003)

음악 장르에 대한 개방적 사고, 연주 실력과 창의성, 그리고 무엇보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를 갖춘 그는, 현대 재즈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재목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팻 매스니가 기타에서 이룩한 업적을 그는 피아노에서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단 10여 년의 현역 활동으로도 이후의 재즈 피아노 트리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재즈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