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a barnebys.com

지금으로부터 약 30년을 거슬러 올라간 1988년 8월 12일, 미국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는 하늘나라로 갔다. 거리의 거칠고 지저분한 낙서로 시작해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비극의 그림자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난 그를 몇 가지 장면으로 추억해보자.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방황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기영화 <바스키아> 예고편

장 미쉘 바스키아(이하 ‘바스키아’)는 1960년, 아이티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다른 많은 흑인의 처지와는 달리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어린 바스키아를 여러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거나 몇 개의 외국어까지 가르칠 정도로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된 바스키아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 십 대 시절을 보내게 된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역사

줄리안 슈나벨이 만든 영화 <바스키아>(Basquiat, 1996)에 따르면, 바스키아는 파블로 피카소를 계기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갔던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바스키아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처음으로 보게 되고, 다른 많은 화가처럼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영화 <바스키아> 中 어머니와 함께 피카소의 작품을 감상하는 바스키아

 

이후 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스(이하 ‘디아스’)와 ‘세이모(SAMO)’라는 크루를 결성한다. 세이모는 ‘SAme Old Shit’의 줄임말로, 바스키아와 그 친구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였다. 바스키아와 친구들은 뉴욕 소호 거리를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와 크레용으로 담벼락을 휘갈겼다.

세이모(SAMO) 활동 시절 바스키아 Via artwort.com

 

그렇게 세이모 활동을 이어가던 이들은 ‘유명세’에 대한 시각 차이를 계기로 멀어지게 된다. 바스키아는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길 원했고, 디아스는 영원히 익명의 화가로 남길 원했다.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 그들은 이내 세이모를 해체하기에 이르고, 거리 곳곳에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낙서를 남기면서 완전히 갈라섰다. 이 낙서는 세이모의 마지막을 뜻하는, 일종의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바스키아와 친구들이 남긴 거리 낙서 ‘세이모는 죽었다’ Via artwort.com

 

영원한 뮤즈, 앤디 워홀

1980년, 바스키아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앤디 워홀(이하 ‘워홀’)이다. 만일 바스키아에게서 워홀을 지운다면, 화가로서의 그의 행적도 대부분 도려내야 할 정도로 워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드나들게 했다.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워홀과 바스키아 Via widewlls.com

예술적으로 부흥기였던 시대, 세계적인 미술 시장이었던 뉴욕에서 바스키아는 어느덧 예술계의 루키에서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림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렸고, 바스키아는 상업적으로는 명백히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워홀은 바스키아의 조력자이자 뮤즈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양면성

그러나 바스키아의 경우,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전에 없던 독창적인 화풍으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었던 바스키아는 어느덧 그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명한 화가’가 꿈이었던 바스키아는 역설적으로 그 유명세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무렵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 같은 소문까지 듣게 되면서 더욱 괴로운 상황에 놓였다. 

죽기 1년 전 바스키아의 모습 Via dazeddigital.com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 이런저런 갈등 상황에서 괴로워하던 바스키아는 시간이 흘러 그 자신의 신앙과도 같았던 워홀과도 멀어졌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기획했던 전시가 실패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렇게 한동안 워홀과 교류하지 않았던 바스키아는 1987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고로 워홀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심장발작으로 돌연 사망한 워홀의 소식을 들은 바스키아는 큰 상실감과 함께 심각한 약물 중독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일 년 후, 바스키아 역시 워홀의 팩토리에 드나들던 다른 이들처럼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죽어도 그를 놓아주지 않는 명성

지난 5월, 바스키아의 작품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천억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1982년 작인 <무제>가 미국 작가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경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워홀을 처음으로 뛰어넘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스키아 작품의 값어치는 멈출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만일 바스키아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살아 생전보다 훨씬 더 높아진 자신의 ‘몸값’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약 1248억원 낙찰된 바스키아의 <Untitled>(1982) Via thebxmagazine.com

 

비극과 유머가 공존하는 화풍

바스키아는 거리의 거칠고 지저분한 낙서로 시작해, ‘검은 피카소’나 ‘미국의 고흐’로 불리며 천재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작품 소재로 삼았던 건 주로 그 자신의 인종적 뿌리와 인생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프리카인이라는 유전적 뿌리, 흑인을 겨냥한 인종차별, 자유를 갈망하는 기질, 뜻밖의 성공으로 인한 불안과 갈등, 1980년대 미국의 자본주의 세태는 모두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Philistines>(1982) Via wikiart.ofg
<Scul>(1981) Via wikiart.ofg
<Irony of the Negro Policeman>(1981) Via wikiart.ofg
<Cabeza>(1982) Via wikiart.ofg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폭력적인 요소, 도처에 만연한 죽음과 생존을 향한 본능이 공존한다. 비극의 냄새가 만연하는 가운데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는 바스키아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바스키아가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채 십 년이 되지 않지만, 그 기간에 남긴 삼천 여개의 페인팅과 드로잉 스케치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그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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