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단편영화를 찍으며 자신만의 무드를 찬찬히 완성해온 김종관 감독이 세 번째 장편영화 <더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동안 감독의 작품에서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배우 정유미, 한예리가 한데 모여 더욱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김종관 감독의 뮤즈는 정유미도, 한예리도 아닌 ‘은희’다. 김종관 감독의 은희들을 둘러 보고 나면 앞으로 마주할 세 번째 은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1. 누구보다 사랑에 솔직한, 은희

<조금만 더 가까이>

Come, Closerㅣ2010ㅣ감독 김종관ㅣ출연 윤계상, 정유미, 윤희석, 요조 등

주로 사랑에 관한 단편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김종관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하나의 영화지만 그 안에 서로 다른 다섯 개의 단편을 엮은 듯한 옴니버스 영화로, 그동안 짤막한 순간에 깊은 여운을 담아온 감독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집약한 작품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의 주제는 역시 사랑 그리고 연애다. 그동안 김종관 감독의 단편이, 그리고 무수한 작품들이 얘기해온 가장 보편적인 주제. 그래서 새로울 것 없어 보이지만, 김종관 감독은 이 보편적인 주제를 과장없이 보편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는다. 사랑을 사이에 둔 관계에는 도무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설레고 슬프고 밝은 감정이 얽혀 있다. 영화 속 겹치지 않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그런 사랑과 관계에 관한 감정을 보여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스틸컷

극 중 다섯 개의 인연 중 무엇보다 인상 깊은 인물은 바로 ‘은희’(정유미)다. 은희는 헤어진 연인 ‘현오’(윤계상)를 찾아가 윽박지르고, 너 때문에 연애 불구가 됐으니 책임지라고 말하며 홀로 관계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런 은희는 영화 전체가 말하는 ‘고장 난 사랑’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은희라는 캐릭터에 진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힘은 단연 배우 정유미다. 앞서 김종관 감독의 대표작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첫사랑에 설레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소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이후 감독의 첫 장편에 출연하게 된 정유미는 김종관 감독의 드라마에 빠질 수 없는 첫 번째 은희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1.5. 누군가의, 은희

<사랑의 가위바위보>

One Perfect Dayㅣ2013ㅣ감독 김지운ㅣ출연 윤계상, 박신혜, 박수진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사랑의 가위바위보>는 코오롱스포츠 4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목적으로 제작된 단편영화다. 앞서 코오롱스포츠는 첫 번째 프로젝트로 박찬욱, 박찬경 감독 연출, 송강호 주연의 <청출어람>을 제작했는데, 브랜드 필름답지 않은 감각적인 스토리를 선보인 바 있다. <사랑의 가위바위보> 역시 광고가 아닌 로맨틱코미디 영화다. 무엇보다, 김종관 감독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김종관 감독 특유의 정서가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 출연했던 윤계상의 등장 때문은 아니다. 감독이 작품의 배경으로 즐겨 찾는 ‘남산’, 그리고 여자 주인공 ‘은희’의 등장은 자연스레 김종관 감독의 무드를 떠올리게 한다. ‘운철’(윤계상)과 ‘은희’(박신혜)의 관계를 묘사하는 영화의 분위기를 직접 확인해보자. 그러면 김종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최악의 하루>가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사랑의 가위바위보> 전편보기

 

2. 사랑에서 인생을 마주친, 은희

<최악의 하루>

Worst Womanㅣ2016ㅣ감독 김종관ㅣ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이희준

김종관 감독이 첫 장편 후 6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영화. 작년 여름 개봉한 <최악의 하루>는 원래 ‘최악의 여자’라는 제목으로 여러 영화제에 먼저 소개됐다. 이후 여러가지 이유에서 정식 개봉명은 ‘최악의 하루’로 바뀌었지만, 영화의 내용은 고스란히 최악의 하루를 보낸 여자, ‘은희’(한예리)의 이야기다. 영화의 주된 배경 역시 김종관 감독이 종종 카메라에 담아온 서촌과 남산이다. 은희는 그곳에서 오늘 처음 본 남자 ‘료헤이’(이와세 료), 지금 만나는 남자 ‘현오’(권율) 그리고 전에 만났던 남자 ‘운철’(이희준)를 만나며 웃지 못할 일을 겪는다. 그야말로 최악으로 기억될 하루가 저물 즈음, 영화는 결국 그만하면 나쁘지만은 않은 하루였음을, 그러한 은희였음을 유쾌하면서도 부드럽게 풀어낸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등장한 '현오', '운철' 같은 남자 인물들의 이름도 김종관 감독의 전작에서 종종 반복 사용됐다. 그러나 감독이 '은희'라는 캐릭터에 실어온 감정과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 감독은 무엇보다 은희를 빌어 여자의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나아가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써 내려 간다. 두 번째 ‘은희’에 통통 튀는 매력을 불어 넣은 한예리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옴니버스 단편 <아카이브의 유령들>(2014)로 김종관 감독과 먼저 작업한 바 있는 한예리는 <최악의 하루> 이후 정유미를 잇는 김종관 감독의 뮤즈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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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 번째, 모두의 은희

<더 테이블>

The Tableㅣ2016ㅣ감독 김종관ㅣ출연 정유미, 한예리, 정은채, 임수정

김종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더 테이블>은 하나의 카페, 하나의 테이블에 하루 동안 펼쳐지는 네 개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와 비슷한 옴니버스식 구성을 사용하면서도, 같은 공간에서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죽 펼쳐내는 이번 영화는 한층 무르익은 감독 특유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게다가 이번 작품에는 감독의 이야기 속 ‘은희’들을 차례로 맡아온 배우 정유미, 한예리가 한데 모였다. 거기에 정은채, 임수정 같은 든든한 배우들이 더해져 더욱 기대를 모은다. 물론 ‘은희’가 빠지지 않는다. 미리 말하자면, 세 번째 은희는 한예리다.

<더 테이블>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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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이블>은 겹치지 않는 네 커플 각각의 사연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와 인연, 사랑에 관한 삶의 단면을 솔직하게 그려낸다. 그중 ‘은희’(한예리)는 결혼 사기를 도모하기 위해 카페에서 만난 ‘가짜 엄마’(김혜옥)와 이야기를 나누며 뜻밖의 감정을 느끼는 인물. 전작에서 거짓말을 일삼던 은희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번 은희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번 영화는 은희뿐 아니라 저마다 사연을 지닌 모든 인물을 섬세하게 클로즈업한다. 관객의 마음으로 울려 퍼질 이야기는 은희의 이야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인물에 마음이 닿더라도 결국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가장 진솔한 존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동안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통해 늘 마주쳤던, 저마다의 ‘은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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