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영화 팬이라면,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해도 그의 ‘음악’은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적은 예산으로 만든 드라마에서부터 할리우드 대작에 이르기까지, 무려 백 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영화 음악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리들리 스콧, 크리스토퍼 놀란, 마이클 베이를 포함한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업하는 작곡가 한스 짐머(Hans Zimmer)다. 그가 거친 영화들의 장르적 스펙트럼만큼이나 다양한 음악을 먼저 만나보자.

 

Via imdb.com

독일 출신의 한스 짐머는 <레인 맨>(Rain Man, 1988)의 음악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사실 데뷔작은 따로 있었다. 폴란드 출신 감독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성공은 최고의 복수다>(Success Is the Best Revenge, 1984)를 작업하며 영화 음악계에 첫발을 들였다. <성공은 최고의 복수다>를 공동 작업했던 작곡가 스탠리 마이어스와는 <나이트메어 눈>(Nightmare at Noon, 1988), <종이집>(Paper House, 1988) 등의 작품에서도 함께했다. <레인 맨>은 스탠리 마이어스와의 작업적 결별 이후 작업한 영화로, 한스 짐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영화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한스 짐머의 가장 잘 알려진 초기작 중 하나인 <레인 맨>

한스 짐머에게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작곡가’란 수식이 붙은 건, 그가 <더 록>(The Rock, 1996), <트랜스포머>(Transformers)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 같은 전 세계의 인기를 끈 대작들을 작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블록버스터에 속하는 액션이나 SF뿐만 아니라 코미디, 드라마, 로맨스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자신만의 스코어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또한, 그 자신의 장기이기도 한 화려하고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물론, 때론 잔잔하고 때론 록킹한 트랙까지 선보이며 어떤 연출이라도 탁월한 음악으로 구현해낸다.

젊은 시절의 한스 짐머 Via filmcentro.com

한스 짐머의 음악적 역량은 그 자신의 과거에 기인한다. 영화 음악으로 데뷔하기 전의 한스 짐머는 뉴웨이브 밴드 버글스(Buggles)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건반도 친 뮤지션이었다. 버글스의 대표곡인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그 예다. 뉴웨이브 밴드에서 신시사이저 세션을 맡으며 음악을 시작했던 한스 짐머는, 어느덧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 음악으로 할리우드를 종횡하는 거장이 되었다.

한스 짐머가 신시사이저 세션으로 참여한 버글스의 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오케스트라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주를 이루는 한스 짐머 음악의 이면에는 또 다른 특징이 스며 있다. 그는 중심 멜로디를 음악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지하되, 구간마다 조금씩 변주를 주는 미니멀리즘 스타일을 지향한다. 또한, 활이 아닌 날카로운 금속으로 첼로의 줄을 튕기거나,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굉음을 담아 연출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스 짐머의 웅장하고도 정제된, 대중적이고도 실험적인 영화 음악을 차례로 감상해보자.

 

<덩케르크>(Dnkirk, 2017)

<덩케르크> 예고편

<덩케르크>는 러닝타임 내내 음악이 그 존재감을 잔뜩 드러내는 영화다.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감독 크리스퍼 놀란의 의도대로, 영화는 줄어든 대사의 빈자리를 음악이 오롯이 채우며 진행된다. 한스 짐머의 음악은 적국의 전투기가 내는 굉음, 포탄과 총탄으로 뒤범벅된 곳에서 절규하는 이들의 모습과 어우러지며 관객을 영화 속 전쟁통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덩케르크>의 대표 곡 ‘Supermarine’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

<다크 나이트> 예고편

가장 완벽한 메소드 연기 중 하나로 기억될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 시퀀스에도 한스 짐머의 손길이 담겼다. <다크 나이트>의 영화 음악은 한스 짐머와 작곡가 제임스 뉴튼 하워드가 공동 작업했는데, 조커가 희대의 명대사 ‘Why so serious?’를 읊조리는 장면은 한스 짐머 단독으로 완성했다. 활이 아닌 금속성의 초크로 현악기 줄을 튕겨 낸 소리는 무겁고 음침한 전자음과 맞물리며 조커의 음성만큼이나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크 나이트>의 대표 곡 ‘Why So Serious’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

<블레이드 러너 2049> 예고편

감독 리들리 스콧과 한스 짐머 사이의 인연은 1989년 <블랙 레인>(Black Rai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 2001)을 포함한 영화를 리들리 스콧과 함께 작업했던 한스 짐머는 그의 대표작인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의 작업에 뒤늦게 합류했다. 리들리 스콧이 기획을 맡고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맡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메인 작곡가인 요한 요한손과 더불어 또 한 번 쉽게 잊히지 않을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예고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는 로맨스 작가 ‘멜빈’(잭 니콜슨)이 쓰는 로맨스 소설보다 더 로맨틱한 영화 음악이 흐른다. 음악으로 스펙터클을 구현하기로 유명한 한스 짐머의 또 다른 장기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는 기존에 있는 곡들과 한스 짐머가 작업한 곡들이 함께 수록돼 있는데, 영화와 동명이기도 한 그의 곡 ‘As Good As It Gets’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그게 어디인지 잘 기억 안 나는 노래”의 ‘어디서’를 담당할 정도로 귀에 익은 곡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표 곡 ‘As Good As It Gets’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

<델마와 루이스> 예고편

<델마와 루이스>의 사운드 트랙은 한 곡을 제외하곤 기존에 있는 곡들로 구성돼 있다. 그 한 곡이 바로 한스 짐머가 작곡한 ‘Thunderbird’다. 주인공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타고 돌아다녔던 ‘썬더버드’의 이름에서 따 온 제목이다. 썬더버드는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탈주하고, 결말을 선택하는 과정을 모두 함께하는 자동차다. 자동차와 이름을 나란히 한 ‘Thunderbird’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배경으로 질주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로킹한 사운드로 풀어낸 곡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대표 곡 ‘Thunder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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