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XX ‘I Dare You’ MV (2017)

The XX가 ‘I Dare You’ 뮤직비디오를 공개했을 때, 해외 언론이 주목한 건 뮤직비디오를 디렉팅한 인물이었다. The XX와 이전에도 작업한 적 있는 촬영감독 알라스데어 맥렐란과 나란히, 라프 시몬스의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The XX가 라프 시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라프 시몬스가 The XX의 뮤직비디오를 디렉팅했다’, ‘The XX가 라프 시몬스와 콜라보레이션했다.’ The XX의 새 뮤직비디오 관련 기사 제목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창안과 혁신의 아이콘, 라프 시몬스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 Via nousculture.com

라프 시몬스는 당대 최고라 평가받는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설립한 라프 시몬스 레이블은 어느덧 패션 역사의 기념비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부터 남성복을 만들기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새 컬렉션을 발표할 때마다 전과는 다른 결과 색으로, 보다 급진적인 태도로, 절제된 미니멀리즘과 거리 패션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루엣으로 무장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라프 시몬스 2014 봄/여름 컬렉션 Via the-f.com.au

지금의 라프 시몬스를 있게 한 배경엔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 자리한다. 음악, 패션, 미술, 디자인을 넘나들며 십 대 시절부터 예술에 천착했던 그는 패션 디자이너가 된 이후,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적 모티프를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심취했던 순수예술, 십 대 시절부터 함께 했던 포스트 펑크와 뉴 웨이브, 서브 컬처와 유스 컬처는 오롯이 그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문화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랐던 소년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하기까지 곁에 있어 준 예술 콘텐츠를 소개한다.

 

#Fashion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점,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가구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라프 시몬스(이하 ‘시몬스’)가 옷을 만들게 된 데에는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이하 ‘마르지엘라’)의 쇼였다. 1990년대 초, 그는 디자이너 발터 반 비렌동크 밑에서 일하다 우연한 기회에 마르지엘라의 쇼를 보게 되었다. 그를 패션 디자이너의 길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마틴 마르지엘라에 관한 패션 필름 <The Artist Is Absent> 중 마틴 마르지엘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라프 시몬스(09:57)

당시 시몬스는 마르지엘라가 보여준 아방가르드함에 완전히 매료됐던 모양이다. 마르지엘라는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관습과 질서를 파괴한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의 파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시침선이 바깥으로 드러나도록 재봉을 한다거나, 모델의 얼굴을 베일로 몽땅 가려버린다거나, 끝단을 마감처리 하지 않고 올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해체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훗날, “1990년도에 본 마르지엘라 쇼는 내 패션의 시작”이라고 고백하기도 한 시몬스는 마르지엘라가 보여준 획기적인 스타일과 전위적인 태도에 매료된 후,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컬렉션 Via vfiles.com

 

#Design

조이 디비전으로부터 시작된 인연, 피터 사빌(Peter Saville)

시몬스를 향해 사람들은 ‘패션계의 아웃사이더’, ‘마이너한 감성을 지닌 디자이너’라는 수식을 붙이곤 한다. 질 샌더, 크리스챤 디올, 캘빈클라인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 그에게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수식이지만,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라프 시몬스의 조력자 피터 사빌이 작업한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 앨범 아트 커버

시몬스는 서브 컬처와 유스 컬처가 가진 감성과 태도를 패션으로 녹아내고자 했다. 뉴 웨이브와 신스 팝, 포스트 펑크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단어를 남성복의 디테일로 반영한 것이 대표적이다. (수학자였던 앨런 튜링의 이름을 옷에 그대로 써 넣은 건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튜링이 동성애자였음을 떠올려 보면 딱히 예외적이지도 않다.) 시몬스의 작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뉴 오더와 그의 전신인 조이 디비전을 남성복에 덧입힌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엔 피터 사빌(이하 ‘사빌’)이란 인물이 있었다. 사빌은 조이 디비전과 그 후신인 뉴 오더의 앨범 아트를 디렉팅한 그래픽 디자이너다.

Via squarespace.com

조이 디비전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펑크에 심취했던 시몬스는 2000년대 초, 사빌을 자신의 컬렉션으로 소환하기에 이른다. 시몬스와 사빌이 협업한 2003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스트리트 무드와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가 함께 스며든 역작이었다. 이 컬렉션 이후에도 두 사람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다. 가창 최근에는 사빌이 시몬스의 새 컬렉션을 위한 오브제 디자이너로 참여하기도 했다.

 

#Movie

패션쇼로 소환된 시퀀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시몬스가 혁신의 소재로써 동시대 영상 콘텐츠를 차용한 증거 중 하나다. 2017년 7월 11일, 시몬스는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며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패션쇼는 안개 자욱한 밤, 붉고 푸른 네온사인과 랜턴에 의지한 채 진행됐다. 런웨이가 아닌 길거리,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 중국풍의 랜턴과 조화를 이룬 시몬스의 새 컬렉션은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세계를 모티프로 한 결과물이었다.

 

라프 시몬스 2018 봄/여름 컬렉션

다만 시몬스는 <블레이드 러너>의 상실된 인간성이나 어두운 미래상 같은 같은 콘텍스트까지 모사한 건 아니었다. 그가 컬렉션으로 보여주고자 한 건 영화 속의 디스토피아 적 세계관이 아니라 과거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새로운 패션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시몬스는 약 35년 전 세상에 나왔던 공상과학 영화에 담긴 예술성, 그 창조적인 태도를 뿌리로 자신만의 혁신을 이끌어냈다. 봄/여름 컬렉션의 통상적인 비주얼과는 다른 의상들은 시몬스가 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차원의 해석이자 상상력이었다.

라프 시몬스 2018 봄/여름 컬렉션
  Via hungertv.com

 

#Art

영원한 조력자,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

시몬스는 자신의 전공 분야였던 디자인은 물론 순수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2014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그 관심과 애정이 패션으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미국의 설치미술가 스털링 루비(이하 ‘루비’)와 협업한 컬렉션은 당시 에이셉 라키나 지드래곤을 포함한 수많은 스타가 주목했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스털링 루비(좌)와 라프 시몬스(우) Via nytimes.com

 

스털링 루비의 설치 작품 및 회화 Via moca.org cargocollective.com

시몬스와 루비의 인연은 시몬스가 크리스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루비는 미국 사회가 안은 여러 부조리한 문제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였는데, 시몬스는 이런 루비의 작품세계를 늘 지지하고 칭찬했다. 시몬스의 예술적 뮤즈이자 절친한 동료이기도 했던 루비는 2014년, 시몬스의 제안으로 그의 새 컬렉션에 자신의 작업 모티프를 고스란히 끌어다 놓았다.

 

라프 시몬스 2014 가을/겨울 컬렉션 Via dazeddigital.com

 

라프 시몬스 2014 가을/겨울 컬렉션 Via visionaireworld.com

루비는 자신의 환각적이고도 대담한 색상의 회화, 성조기를 모티프로 한 설치 미술을 시몬스의 패션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옷에 수놓아진 회화, 런웨이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만든 장치에서 루비의 숨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Music

용모 단정한 뮤지션들의 화려한 캣워크,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시몬스의 컬렉션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는, 유스 컬처의 자유분방함과 테일러링의 정밀함을 동시에 녹여내는 재능이다. 데뷔 후 3년 만에 발표한 1998~1999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그런 그의 재능이 일찌감치 드러난 결과물이었다.

 

Via factmag.com

당시 시몬스는 자신이 십 대 시절 좋아했던 크라프트베르크를 테마로 컬렉션을 구상했다. 급기야는 크라프트베르크 멤버들을 직접 런웨이로 소환해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멤버들은 팀의 상징이기도 한 붉은 셔츠와 검은 넥타이 차림으로 런웨이에 등장했고, 미니멀한 의상을 입은 다른 모델들과 함께 런웨이를 활보했다. 시몬스는 크라프트베르크 외에도 조이 디비전의 이언 커티스나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리치 에드워즈를 포함한 여러 뮤지션을 자신의 작업적 모티프로 활용했는데, 크라프트베르크는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시몬스의 컬렉션에 참여한 뮤지션이었다. 

라프 시몬스의 1998~1999년 가을/겨울 컬렉션에 참여한 크라프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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