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이라는 말은 소비 심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대척점에 있는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이하 ‘언리밋’)’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리밋은 한정된 물리적 수량으로부터 오는 소비 심리에 호소하지는 않는다. 언리밋에 모이는 책, 사진, 음악, 영화, 미술 같은 다양한 영역의 물건들은 여러 면에서 제한을 두지 않는, 말마따나 ‘무한정’한 방식으로 제작자와 관람자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인디포스트] 언리밋 관련 기사 '언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더 많이 알려진 아티스트들’ [바로가기]

작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밋은 위치로나 상징적으로나 참여자들의 접근성을 높였고, 결과적으로 역대 최대 관람객을 수용하며 행사의 가치와 규모를 더욱 확장했다. 자연스레 다음 해 언리밋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올해 언리밋을 한 달여 앞둔 10월, 트위터를 중심으로 언리밋의 공동주관사이자 개최 장소인 일민미술관 소속 함영준 책임 큐레이터가 행한 ‘성폭력’이 연이어 고발되면서 일민미술관과 주최사 유어마인드는 중대 기로에 섰고, 행사 개최가 잠시 불투명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함영준 성폭력 사건에 앞서 벌어진 <미지의 세계> 이자혜 작가의 성폭력 사건에 관해서도(유어마인드는 <미지의 세계> 단행본 출판사다) 성폭력 피해자 편에 선 단호하고 투명한 입장을 밝혔던 유어마인드답게, 함영준 성폭력 사건에 관한 입장 및 언리밋 개최 유무에 관한 입장 또한 참여 아티스트와 관람객 모두를 배려한 최선의 결정을 했다.

결론적으로, 여덟 번째 언리밋은 예정대로 열린다. 단, 작년 처음 시도했던 ‘포스터온리’는 취소됐고, 공동주관사였던 일민미술관은 후원사로 변경됐다. 어찌됐든 총 178팀(직접 판매부수 175팀, 무가지 3팀)의 아티스트 판매 부스가 3일 동안 일민미술관에 설치되는 건 변함이 없다는 이야기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출판물들이 올해엔 어떤 양상으로 존재할까. 몇몇 참가팀을 통해 올해의 언리밋 동향을 살펴보고, 주목할 만한 작품들도 기억해두자.


#만화책


▲ <재윤의삶> ‘10년 뒤에 보면 기억도 안 날 만화’

만화가들이 직접 엮은 만화책 단행본은 유독 각별하다. 게다가 출판만화가 웹툰 시장으로 기울어진 지도 꽤 지난 지금,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그곳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지면 위에 만화를 얹은 출판물이라면 더욱 가치있다. SNS에서 단편 만화 <재윤의삶>을 그리는 정재윤은 자신의 첫 장편 만화책 <서울구경>을 언리밋에서 판매한다. 주로 트위터에 비현실적 단편 만화를 연재하는 최준혁은 총 9편을 엮은 단편집 <자본주의 히어로>를 선보인다. 웹툰 기반 출판물도 물론 있다. 반려 식물을 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 <식물생활>의 안난초 작가는 챕터 1, 2를 단행본으로 엮었다. 일러스트레이터 Tillurillu는 장범준 2집 앨범 자켓을 작업한 만화가 박수봉의 웹툰 <사이>를 리메이크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사진과 실험


▲ 김진솔의 개인사진집 인쇄과정

언리밋에서 사진집은 빠질 수 없는 출판물 중 하나다. 무한정한 주제의 온갖 이미지들이 더욱 실험적인 시도 끝에 탄생했다. 참가팀 중 하나인 독립출판 건축잡지 <매거진 파노라마>의 포토그래퍼 김진솔은 별도의 개인 사진집을 선보인다. 사진집 <City x Structure>는 한국과 호주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도시'와 '구조'라는 주제를 조명한다. ERUTUF(이루투프)는 서울, 파리, 도쿄를 다녀온 후 공간의 차이에서 역설적으로 자기 내면의 동일성을 확인한 결과물을 사진집 <Difference & Identity>에 담아 보여준다. 테넌트북스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35mm 포인트 앤드 슈트 카메라’로 촬영한 한정판 사진집과 카메라 컬렉션을 판매할 예정. 1990년대 태어난 4명이 결성한 그룹 구경거리는 젊은 사진가들을 위한 공간의 부재를 느끼고, 같은 시작점에 있는 사진가들의 사진집 소개를 자처한다.


#텍스트의 예술


▲ 다마고치 매뉴얼의 ‘다마고치 매뉴얼’

‘서울아트북페어’라는 부제처럼, 언리밋에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비주얼 디자인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책’이라고 하면 ‘텍스트(글)’가 빠질 수 없는 법. 독립출판물의 글은 독특한 내용 자체로 예술성을 얻곤 한다. 동신사는 김동신이 작성 중인 인덱스카드 1,306장에 관한 색인을 수록한 독특한 출판물 <인덱스카드 인덱스2>를 판매한다. 참고로 소설가 정지돈이 색인을 이용해서 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는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디자인 스튜디오 선데이는 앞서 진행했던 근로기준법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다시 한 번 책으로 제작했다.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준다는 근로기준법 조항들을 읽기 좋게 담은 책은 과연 합법적인 예술이다. 다마고치 매뉴얼은 다마고치 게임을 위한 사용설명서와 공략집을 선보인다. 소량의 다마고치도 함께 판매할 예정.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뉴얼은 오히려 귀여운 아트북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 <요술보지> 김인엽 작가의 그림이 담긴 달력 (출처 텀블벅)

최근 가장 화제였던 이슈 중 하나인 ‘페미니즘’은 당연히 문화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언리밋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의 위치를 주목하는 팀들이 눈에 띈다. 페미니즘 책을 만드는 도서출판 봄알람(baume à l'âme)은 책 외에도 <여권통문> 실시일,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일, 신교수 성희롱 사건 우조교 승소 판결,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여성·인권과 관련된 기념일과 사건을 기록한 2017년 달력을 제작해 판매한다. “우리는 우리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고 싶다"라는 슬로건 아래 여성이 신체의 자기 결정권을 갖도록 돕고 응원하는 불특정 다수 모임 요술보지는 여성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6명의 작가들과 협업해 제작한 6가지 달력을 판매한다. 달력 1개 판매당 1,000원을 한국여성민우회에 기부한다. 그밖에, 페미니즘 관련 논쟁과 이야기를 트위터와 블로그에 써온 페미로그와 <언론의 성차별 사례>, <피해자를 위한 젠더 폭력 법적 대응 안내서> 같은 책을 만드는 세 명의 페미니스트가 모인 셰도우 핀즈의 출판물도 만날 수 있다.


#영화의 확대재생산


▲ 매거진 <프리즘오브> 

영화는 가장 많이 다뤄지고, 그만큼 무한한 소재다. 그래서 더욱 무한정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영화 관련 독립출판물들은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영화잡지 <아노>는 매 호 한 가지 테마 아래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영화들에 관한 비평을 담는다. 이번 언리밋에서는 특별히 신간인 <5호 스토리>를 첫 공개한다. 비정기간행물 <프리즘오브>는 한 호에 한 영화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독창적인 글과 디자인으로 이미 입소문이 자자해 금방 매진될 가능성이 크다. 예술영화부터 상업 영화에 이르기까지 소장 가치 있는 작품들을 고품격의 블루레이로 제작하는 플레인아카이브는 블루레이와 관련 굿즈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에서 운영하는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에서 판매하는 영화 포스터와 굿즈는 언제나 기대할 만하다.


#해외 독립출판물


▲ 도쿄에 위치한 ‘commune store’

일본의 다양한 독립출판사, 갤러리, 아티스트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2009년부터 시작한 일본 최초의 아트출판물 박람회인 도쿄아트북페어(Tokyo Art Book Fair)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참여한다. 앞서 유어마인드는 올해 9월 도쿄에서 열린 도쿄아트북페어에 세 번째로 참가해 방문객이 소지한 인쇄물과 한국의 인쇄물을 교환하는 '무가지 교환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일본의 아티스트 집단 Commune은 전 세계의 발굴되지 않은 유망한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자체 레이블 '코뮨 프레스'에서 제작한 아트북을 선보인다. 도쿄에서 운영하는 샵에서나 구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예술품들을 언리밋에서 직접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8 – 서울아트북페어 2016
일시 2016.11.25(금)~11.27(일)
장소 일민미술관 1-3층(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홈페이지 unlimited-edition.org
주최사 유어마인드 트위터 twitter.com/your_mind_com


(메인이미지 출처-'언리미티드 에디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