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인물이 앉는 의자를 눈여겨 본 적 있는가. 카메라에 잡히는 사물 중 어느 하나 의미 없이 놓인 건 없듯, 주인공이 앉은 의자 역시 프레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캐릭터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시공간적 배경을 부연하는 장치로, 연출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오브제로 기능하는 영화 속 의자에 주목해 보자.

 

<옥자> 속 루시 미란도의 사무실에 등장하는 의자들(1:06)

<옥자>를 봤다면 기억날 만한 장면 하나. 슈퍼 돼지 ‘옥자’를 기획한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그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전망 좋은 고층 건물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 글로벌 기업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업무 공간답게 소파, 의자, 테이블 뭐 하나 허투루 놓인 가구가 없다. 그곳에서 루시와 임원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든, 그 값어치도 가히 ‘세계적’인 의자에 앉아 업무를 주고받는다. 주인공의 권력, 재력, 취향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시공간적 배경을 부연하는 장치로, 연출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오브제로 기능하는 영화 속 의자들에 대해 알아보자.

 

미친놈의, 미친놈에 의한, 미친놈을 위한

<아메리칸 사이코>의 바르셀로나 체어 

American Psychoㅣ2000ㅣ감독 메리 해론ㅣ출연 크리스찬 베일, 윌렘 대포, 자레드 레토

영화는 그 제목으로써 주인공 ‘패트릭’(크리스찬 베일)을 오차 없이 정확하게 묘사한다. 금융 회사 CEO인 패트릭은 꽤나 ‘있는 집’ 자식이다. 아버지가 꽂아준 직책엔 별 관심 없고, 헬스, 피부 관리, 비싼 레스토랑 가기, 사람 죽이기 같은 일에만 성의를 보인다. 물질적으론 제대로 축복받은 인생이지만, 인성으론 지옥에서도 구제받지 못할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 뉴요커의 집은 명품 집결지 그 자체다. 그중 거실에 놓인 ‘바르셀로나 체어(Barcelona Chair)’는 단연 눈에 띄는 오브제다. 영화 초반부터 카메라에 몇 번이나 잡히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 의자는 관상용 살림살이로, 손님 접대용으로, 그리고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기능한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1929년에 디자인한 이 의자는 명품만 좋아하는 패트릭의 안목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크롬 도금 프레임, 가죽으로 덧씌워진 시트로 구성된 의자는 날렵한 굴곡과 묵직한 안정감을 동시에 지녔다.

바르셀로나 체어 Via theredist.com
바르셀로나 체어를 디자인한 미스 반 데어 로에 Via farnsworthhouse.com

 

인류 역사상 가장 스타일리쉬한 우주 정거장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진 체어

2001: A Space Odysseyㅣ1968ㅣ감독 스탠리 큐브릭ㅣ출연 케어 둘리, 게리 록우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지점에서 가장 전위적인 전략을 취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했지만, 그는 또다시 다른 작품으로써 ‘그러나 과연 완벽에 지나침이 있겠는가’ 반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큐브릭의 완벽주의는 소품으로 표현되는 미장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우주정거장에 놓인 붉은 의자는 하얀 내부와 대조를 이루며 공간에 악센트를 불어넣었다. ‘진 체어(Djinn chair)’라 불리는 이 의자는 디자이너 올리비에 모그(Olivier Mourgue)의 작품이다. 모그는 사람 형상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의자를 여럿 선보였는데, 영화 속 의자 역시 같은 맥락으로 디자인했다. ‘우주’라는 공간이 주는 생경함과 마치 응접실 같은 편안함을 모두 담아내며 영화의 미감을 끌어올렸다.

올리비에 모그의 진 체어  Via objetsdhier.fr

 

판타지물의 장치로 기능하는 오브제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의 엘다 체어

The Hunger Gamesㅣ2012ㅣ감독 게리 로스ㅣ출연 제니퍼 로렌스, 조쉬 허처슨, 리암 헴스워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가상 세계 ‘판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SF영화다. 열두 개 구역으로 나뉘어진 판엠은 체제 유지라는 명목아래 생존 게임인 ‘헝거 게임’을 강제로 실행한다. 게리 로스 감독은 최후의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마치 일본의 <배틀로얄> 같은 살인 게임 판타지물을 완성하기 위해 프레임에도 판타지적인 미장센을 녹여냈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에 등장하는 ‘엘다 체어(Elda Chair)’는 영화 속 독재 국가인 판엠의 판타지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장치다. 산업 디자이너 조 콜롬보(Joe Colombo)가 만든 이 의자는 파이버 글라스에 가죽을 덧씌운 회전의자다. 구불구불하고 우락부락한 가죽 시트는 흡사 소시지 같은 외양으로 그 독특함을 과시한다. 영화 속에선 비일상적 세팅이 가득한 프레임에 녹아 들며 가상세계의 판타지를 부연하는 오브제로 활약한다.

엘다 체어 Via dailyicon.net
자신이 디자인한 엘다 체어에 앉은 조 콜롬보 Via en.wikipedia.org

 

“저는 미래에서 왔는데요”

<오스틴 파워 - 제로>의 옥스 체어

Austin Powers: International Man Of Mysteryㅣ1997ㅣ감독 제이 로치ㅣ출연 마이크 마이어스, 엘리자베스 헐리

“미래에서 만나자, 오스틴.” 영화 속 악당 ‘이블’(마이크 마이어스) 박사는 자신을 잡으러 온 비밀요원 ‘오스틴 파워’(마이크 마이어스)를 피해 냉동고를 타고 미래로 도망간다. 30년 후의 미래로 간 이블은 그곳에서도 악당 짓거리를 멈추지 않는다. 지구를 위협하는 이블, 그리고 이블을 처단하려는 오스틴의 이야기가 시종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동안에도, 영화는 ‘SF’라는 장르적 특성을 단단히 쥐고 간다.

부하들을 불러 놓고 범죄 모의를 하는 이블이 앉은 의자는 ‘공상과학’ 영화의 미장센을 담당하는 오브제이자, 이블이 움켜쥔 권력을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블은 부하들의 그것과는 격이 다른 의자에 앉아 온갖 ‘나쁜 짓’을 지시한다. 한스 베그너(Hans Wegner)가 디자인한 ‘옥스 체어(Ox Lounge Chair)’는 1960년에 만든 의자라곤 믿기 힘들 만큼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SF적인 설정 탓에 30년을 훌쩍 건너 뛰어버린 미래 세계에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옥스 체어 Via hivemoder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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