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믿고 보는 감독, 배우’라는 말은 있어도, ‘믿고 보는 각본가’라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영화들은 어느 각본가를 이유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특히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더욱 그렇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Taylor Sheridan)을 두고 하는 말이다.

테일러 쉐리던 (출처 – deadline)

테일러 쉐리던은 각본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영화 <화이트 러쉬>(2003), 동명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베로니카 마스>(2004), 드라마 <선즈 오브 아나키>(2008) 시즌1 등에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물론 그의 진가는 연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서 빛을 발했다. 테일러 쉐리던은 주로 범죄물을 작업하는 데 있어 인물의 심리에 포커스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이 각본가가 갖가지 사회적 모순을 꼬집는 방식이기도 하다. 올해 테일러 쉐리던은 또 한 편의 범죄 드라마를 썼다. 이번에도 역시 전혀 가볍지 않은 질문과 모순을 얘기하지만, 곧 관객을 가볍게 설득해 버린다.

 

#테일러 쉐리던식 범죄와의 전쟁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ㅣ2015ㅣ감독 드니 빌뇌브ㅣ출연 에밀리 블런트, 베니치오 델 토로, 조슈 브롤린

영화는 사상 최악의 마약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요원들의 작전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각 요원의 행동은 단순히 마약 조직 소탕 작전만으로 귀결되기엔 부족해 보인다. 테일러 쉐리던은 각각 다른 정의와 목표를 가진 세 캐릭터를 통해 선과 악, 진정한 정의에 대해 묻는다. 그래서 영화의 긴장감은 폭력적인 총소리보다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대사에서 더욱 고조된다. 어차피 총을 든 요원들의 화려한 전투 액션 따위는 비중이 작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과 명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액션 신을 기대케 하는 범죄 스릴러물에서 유독 각본이 주목받은 이유다. 단연 최고의 서스펜스라 평가받은 이 작품으로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은 제68회 미국작가조합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예고편

ㅣ영화보기ㅣN스토어유튜브

 

#테일러 쉐리던이 꿰뚫어본 현대판 서부극
<로스트 인 더스트>

Hell or High Waterㅣ2016ㅣ감독 데이빗 맥켄지ㅣ출연 크리스 파인, 벤 포스터, 제프 브리지스

테일러 쉐리던은 애초 기획한 범죄 드라마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로스트 인 더스트> 또한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인상 깊은 이야기를 전한 각본가가 이번에도 범죄극을 썼다는 소식에 진작부터 기대가 모였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98%를 기록하는 등 해외 평단과 관객의 열렬한 지지는 상당 부분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텍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테일러 쉐리던은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 영화 배경인 서부 텍사스를 현실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많은 의미를 실었다. 그는 백인이 원주민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기존 서부극의 속성을 그대로 21세기로 옮긴 현대판 서부극을 완성한다. 새로운 착취자로 대변되는 은행, 빚더미에 내몰려 범죄자가 된 형제,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백인 형사와 인디언계 형사까지. 모든 상황, 인물, 대사는 여러 부조리를 상징하고 풍자한다. 영화에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텍사스의 풍광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테일러 쉐리던의 메시지가 치밀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테일러 쉐리던은 국내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작년 10월 CGV아트하우스에서 진행한 ‘이동진의 라이브톡’에 <로스트 인 더스트>가 선정됐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각본가 테일러 쉐리던의 이름을 중요하게 언급했다. 또한 한글 자막을 맡은 황석희 번역가는 자신의 트위터에 “<시카리오>의 긴장감이 애초에 테일러 쉐리던의 각본에서 온 게 맞구나”라며 각본가를 향한 호평 어린 메시지를 남겼다.

<로스트 인 더스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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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쉐리든이 보여줄 새로운 범죄 드라마
<윈드 리버>, <매릴랜드> 리메이크

테일러 쉐리던은 공포 스릴러물 <바일: 게임 오브 더 페인>(2011)에서 각본이 아닌 연출을 맡은 적이 있었지만,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 받은 그가 차기작에서 각본과 함께 또 한 번 연출을 시도한다. 현재 제작 중인 <윈드 리버>는 한 여자의 죽음을 둘러싼 추적을 그리는 영화로, 테일러 쉐리던의 또 다른 범죄 추적 드라마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 엘리자베스 올슨, 제레미 레너 등 화려한 캐스팅도 한층 기대를 돋운다.

<윈드 리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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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올해 국내 개봉한 앨리스 위노코 감독의 <매릴랜드>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각본을 테일러 쉐리든이 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릴랜드>는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전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게 된 주인공이 대저택 매릴랜드의 사설 경호를 맡은 후 벌어지는 이야기다. 특히 전직 군인이 겪은 트라우마를 소재로 독특한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리메이크 작품 제목이 <디스오더>인 것으로 보아 이 부분에 더욱 중점을 둔 듯하다. 리메이크 작품은 아직 윤곽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지만, 영화는 테일러 쉐리던이란 이름만으로도 이미 관객을 설득하고 있다.

(메인이미지 = <로스트 인 더스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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