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미술가이자 작가로 활동한 차학경. 일본에서 태어나 독일에 체류하며 작가로 활동하는 다와다 요코. 국적도 주요 활동 국가도 다르지만, 두 작가는 모국에서의 기억과 언어에 동반하는 현상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동양의 여성, 드문 천재성, 디아스포라*, 바이링구얼**이라는 여러 공통점에 ‘VS’라는 대결 구도를 드리우기보다는 ‘ • ’라는 중점을 두었다.

* 디아스포라(Diaspora)-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
** 바이링구얼(bilingual)-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

 

차학경 • 다와다 요코

Theresa Hak Kyung Cha. 주로 테레사 차로 불리는 차학경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나 10대에 들어서자마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떠난다. 문학과 미술을 전공한 그는 문학과 개념미술, 그것들을 섞은 포괄적 퍼포머로 활동했다. 대학 생활 중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배운 프랑스어와 탈식민주의, 비판이론 등은 대표작 <딕테(Dictee)>의 커다란 테마가 되었다.

caption차학경의 가장 대표적인 또 하나의 퍼포먼스 작품 <Aveugle Voix(눈먼 목소리)>(1975). Voix(음성-의견-투표)라는 프랑스어가 적힌 띠를 머리에 두르고, Aveugle(눈먼)이라고 적힌 흰 천을 얼굴에 두른 차학경이 손에 말아 쥔 흰 천을 풀면 SANT(~없이), MOT(단어-메시지), GESTE(제스처-행동-행위) 따위의 글자가 나타나고 앉거나 쭈그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와다 요코(Tawada Yoko)는 러시아 문학 전공 도중 19세에 홀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떠났다. 그의 문학은 이 기차 여행으로부터 출발한다. 길고 긴 여정 동안 여러 정거장을 통과하며 물을 마시는 일을 서서히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순간으로 여겼다. 최근 발표한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앞서 언급한 기차 여행을 모티프로 쓰였다.

다와다 요코는 낭독회를 통해 언어의 비틀림을 몸소 체험하고 듣는 이에게 전달한다. 작가 대 작가뿐만 아니라 태극권과 낭독을 접목한 퍼포먼스를 한 적도 있다.

미리 말하자면 차학경은 1982년도에 강간치사 사건으로 사망했다. 자신이 일하던 뉴욕의 타남(Tanam) 출판사에서 <딕테>가 나온 지 3일 후였다.(차학경의 죽음을 주제로 소설을 발표한 그의 오빠 말에 의하면 책의 초판이 장례식 날 도착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뉴욕 문화계의 차세대를 책임질 천재 작가로 눈여겨봤지만, <딕테>가 대표작이자 유고작이 되었다.

문단 열고 그 날은 첫날이었다 마침표
그녀는 먼 곳으로부터 왔다 마침표 오늘 저녁 식사 때
쉼표 가족들은 물을 것이다 쉼표 따옴표 열고
첫날이 어땠지 물음표 따옴표 닫을 것 적어도 가능한 한
최소한의 말을 하기 위해 쉼표 대답은 이럴 것이다
따옴표 열고 한 가지밖에 없어요 마침표
어떤 사람이 있어요 마침표 멀리서 온 마침표
따옴표 닫고

- <딕테> 프롤로그

<딕테>를 열자마자 책장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눈으로 읽고 발음할 수는 있지만, 의미를 되새기며 저장하는 일은 더뎌만 진다. 부호는 글자로 변형되고, 불어와 영어가 혼재해 도무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또렷하다. 어린 시절(차학경의 부모는 일본 식민 정치를 피해 만주에서 살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다) 겪은 이민자로서의 이질적인 삶을 비롯해 어디에 있든 느낄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 남성중심 사회 같은 거대담론에 대한 저항이 책의 중심을 잡고 있다.

"육신보다 더 적나라하고, 뼈대보다 더 강하며,
힘줄보다 더 질기고, 신경보다 더 예민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 사포

책의 서두에 그는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의 글을 인용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뮤즈의 아홉 여신 이름을 장의 제목으로 붙이고 강인하게 자신의 삶을 열어젖힌다. ‘클리오/역사’ 장에서는 유관순을 통해 자기 민족과 뿌리를 말하고, ‘칼리오페/서사시’를 통해서는 만주에서 교사를 하던 어머니의 삶을 조명한다. 나머지 장에서도 조국의 분단,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식상해 보인다고?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 너덜너덜해진 주제를 그는 오히려 칼로 난도질하고, 가위로 잘게 자른 듯 형식을 파괴하여 시도 산문도 개념 미술도 아닌 장르를 넘어선 결과물로 완성했다.

타남 출판사에서 발표한 <딕테> 초판. 토마토라는 출판사에서 1997년에 나온 한국어판 <딕테>는 헌책방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2004년 어문각 판도 오래 전에 절판했다.

 

독일어로 쓰여(좌) 한국어로 번역된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중). 일본어로 쓰인 <용의자의 야간열차> 표지(우)

다와다 요코는 모국어와 현지어로 작품을 쓴다. 독일에 삶을 꾸린지 5년 후 일본어로 써놓았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해 <네가 있는 곳에만 아무것도 없다>(1987)로 데뷔한 이래 독일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가며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목욕탕(DAS BAD)>(최윤영 옮김, 을유문화사, 2011)의 주인공은 동시 통역사. 그에게 언어는 직업이다. 엉터리 언어가 교차하는 통역 자리에서 의식을 잃은 후 말을 잃어버린 주인공에게, 말하지 못하는 세계는 공포가 아니라 해방의 기쁨이 넘쳐나는 초현실적인 세계다. 다와다 요코는 어딘가에서 말했다. 모국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행위는 비겁하고 무능한 일이라고. 모국어라는 보호막 아래 안주하지 않고 낯선 것에 일부러 부딪혀 당하고 고민하면서 발견하는 비틀린 틈새가 다와다 요코 문학의 정수다.

<딕테>에 관한 해석을 시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묶은 다큐멘터리 <딕테- 차학경 오마주> 스틸컷

더 이상 갱신되지 못하는 차학경의 작품은 학자나 후대의 아티스트에 의해 재탄생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낭독회가 열리며, 2012년에는 이미영 감독의 중편 다큐멘터리 <딕테- 차학경 오마주>가 개봉해 호응을 얻었다.

다와다 요코 <용의자의 야간열차> 한국어판 표지

“<용의자의 야간열차>는 다와다 요코가 기존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정체성을 넘어서려 시도한 작품이다. 고정관념의 틀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인식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맛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선 사유가 불러오는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익숙한 공동체의 규범과 모국어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여행 그 자체와도 닮아 있다.”
- ‘알라딘’ 서평 중

작년 4월에는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다와다 요코의 책 <용의자의 야간열차>(이영미 옮김, 문학동네세계문학, 2016)가 발간되었다. 화자는 야간열차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시기도 배경도 명확하지 않으며 여행자가 누구인지,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저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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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매거진 <DAZED & CONFUSED>, <NYLON> 피처 에디터를 거쳐 에어서울 항공 기내지 <YOUR SEOUL>을 만들고 있다. 이상한 만화, 영화, 음악을 좋아하고 가끔 사진을 찍는다. 윗옷을 벗은 여성들을 찍은 음반 겸 사진집 <75A>에 사진가로 참여했다.
박의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