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립잡지가 탄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학가들이 모여 만든 잡지는 이제 새로운 문예지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기존 문단에 대한 반항이나 권위에 대한 도전 같은 건 크게 관심 없어 보인다. 문예지라고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잡지도 그렇지 않은 잡지도 있다. 그 이름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기도 한다. 단지 시인과 소설가들로만 알던 이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책을 꾸린다. 글 외에 기획과 디자인까지 맡아 만든 이 책들은 다만 커다란 ‘읽는 즐거움’이다.

 

<후장사실주의>

편집자 황예인, 홍상희, 소설가 정지돈, 이상우, 오한기, 박솔뫼, 서평가 금정연, 평론가 강동호 이상 8명과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개와 고양이 몇 마리가 구성원이다. 남미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를 패러디해 ‘밑바닥사실주의’를 만들었고, 본인의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밑바닥사실주의를 패러디해 ‘내장사실주의’를 만들었다. 이들은 일련의 소동을 다시 패러디해 ‘후장사실주의’를 조직했다. 어느 날 정지돈과 오한기가 통화를 하다가 동시다발적으로 “후장사실주의!”를 외쳤다는 금정연의 고백에 비추어 보건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이름을 붙였다.

<후장사실주의 vol.1>

원래는 없던 말처럼 이들은 통일된 이념이나 공유하는 철학 없이 각자 쓸 것을 쓰고 할 것을 한다. 평론가 신형철과 소설가 백가흠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 소설가 백민석과의 대담 같은 소설과 에세이, 비평 외에 번역 원고나 페이퍼 시네마 같은 생소한 장르의 글이 한데 뭉쳐있다. 구성원은 각자 문학계 종사자임과 동시에 이 집단 안에서 글 쓰는 것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정지돈은 식단을, 홍상희는 운전을, 황예인은 고양이 사진을, 박솔뫼는 내부 감사를, 이상우는 해외판촉을, 오한기는 일기를, 금정연은 개가 되고 싶은 한국 중년 남성을, 강동호는 이론적 대계를 담당한다. 그는 또한 원고 마감을 담당하는데, 그가 원고를 다 쓰면 이후에는 어떤 글도 받지 않고 비로소 책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의를 갖고 만들진 않았지만, <후장사실주의>는 기성 문단에 대한 반발, 미래적인 움직임이라는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야 말았다.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천 부를 발간한 후 아직 2권 소식은 없다.

<후장사실주의 vol.1>의 목차.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게 하는 ‘해변의 백가흠’,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칭찬연구소 소장이고 소설가 미셸 우엘벡이 그를 납치해 죽이는 바람에 칭찬이 사라진 미래 사회에 관해 그린 ‘신형철의 칭찬합시다’ 등이 실려 있다.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 당시 판매 부스 전경(좌), 박원순 시장도 산 <후장사실주의 vol.1>(우) (사진 출처- 서울 생활 블로그)

 

‘눈치우기’

시인 유희경, 송승언, 김소연, 하재연, 신해욱과 디자이너 김재연이 만든 ‘눈치우기’는 열린 모임(몇 명의 구성원으로 시작했지만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기를 바라는)이다. 처음엔 협동조합 형태의 시 전문 출판사를 만들려고 했지만 까다로운 절차와 본격적인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잡지를 떠올렸다. 유희경 시인이 출판 등록과 사업자 등록을 본인의 이름으로 했기에 반장을 맡아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한다. 하재연 시인은 총무를, 송승언 시인은 <조립형 text>의 편집, 김재연 디자이너는 아트워크와 조언, 김소연 시인은 마케팅을, 신해욱 시인은 <겨울시집> 편집과 조금의 잔소리를 담당한다.

‘눈치우기 총서 01’ <조립형 text>

‘눈치우기 총서’라는 시리즈의 첫 결과물인 <조립형 text>는 문학가가 모여 만들었기에 문예지로 받아들이는 이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문예지와는 다른 부분이 있다. 청탁을 주고받은 뒤 쓴 글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발적 의지로 쓴 글의 모음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눈치우기라는 이름처럼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함께하면 더 빨리할 수 있고, 놀거나 진지하게 할 수도, 하고 나면 뿌듯한 일들이기를 바라며 글을 모아 싣는다. 11편의 글은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을 바탕으로 우연한 리듬 속에서 뒤엉키고 꼬리를 물고 끝없이 확장되어 독자에게 닿았을 때 저마다의 글로 완성된다. 이런 움직임을 실험하듯 디자인으로 조립해 보여주는 것도 <조립형 text>만의 특징이다. 두 번째 책 <겨울시집>은 첫 책과 다르게 시만을 모았다.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진 묶음 속에 겨울을 만지고 맛본 글과 말이 적혀있다. 겨울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 이들은 다가올 겨울에 내놓을 세 번째 책을 준비 중이다.

출구
- 김소연

80년대에 이 동네는 부촌이었다 그때 나는
이 동네 반지하에 살았고 뒷집 반지하에 살던 애와 단짝이었다
오은애, 그 애 엄마가 영진상가에서 백반집을 한다했지만

백반집의 종업원이었다 영진상가 앞 목욕탕에 갈때마다 생각이 난다
그 애만 모르고 실은 다 알고 있었던 그 애의 거짓말과
종류가 같았던 내 거짓말

이태리 양과자집에서 빵 굽는 냄새가 풍겨온다 빵을 산 적은 없다
빵 한 덩이가 한 끼 밥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아버지는 삼립식품에 다녔고 월급 대신에 빵을 한 박스씩 가져왔다

나는 빵을 먹고 컸지 참,
일산 가는 정류장 옆에 인천 가는 정류장이 있다
마포만두에서 갈비만두를 사들고 버스를 탄 적이 있다
백석이라고 써 있었지만 일산이 아니라 인천에다 나를 내려주었다

현찰을 세고 물건을 건넨다
박스와 사용설명서는 잃어버렸지만 새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깎아주세요 안 돼요 워낙 싸게 내놔서요

2번 출구로 들어가서
5번 출구로 나간다 자판기 커피 속으로 설탕처럼 눈송이가 보태질 때
씨발년아 거기 안 서? 고함을 지르며 아저씨가 이쪽을 쳐다본다
욕은 다 내 얘기인 것 같아 일단 거기에 서 있는다


▲ <겨울시집> 중에서. 화자가 홍대 일대에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시.

‘눈치우기 총서 01’ <조립형 Text> 텍스트 공개 영상

 

<더 멀리>

시인 강성은, 김현, 박시하는 진작부터 잘 어울려 노는 사이였다. 무언가를 자꾸 해보자고 했고, 할 수 있는 것들은 했다. 독립잡지와 출판에 관해 관심을 두고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다 김현 시인이 퇴사하면서 <더 멀리>를 만들었다. 문학 위주의 잡지이지만 문학 독자뿐 아니라 누구든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엽편 소설이나 산문 등을 수록한다. 기존 문예지가 대부분 등단한 이를 위한 장이었다면 <더 멀리>는 등단하지 않은 필자나 독자 투고작을 두루 싣는다. 이렇게 문예지와 같지만 다르기도 하다.

▲ 매호 색과 점으로 만들어지는 <더 멀리> 표지. (이미지 출처- <더 멀리> 페이스북)

<더 멀리>를 만들기 위해 강성은과 김현 시인은 교정 교열과 발송, 홍보, 독자 관리를 맡았고, 박시하 시인은 표지 디자인과 편집을 한다. 맡은 바 외에도 어쩌다 보니 강성은 시인은 강 사장이라 불리고, 김현 시인은 구성원을 위해 헛개나무즙을 챙기는 사랑꾼 역할을, 박시하 시인은 누구보다 일 처리가 빠른 만능 일꾼으로 각자 일하지만, 글을 고르는 기준은 한결같이 같다. 실험적이거나 소소하게 감동적이거나 순수하게 재미있는 글. 그리고 셋 중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있으면 싣지 않는다. 이런 합의로 공식적으로 등단하지 않거나 비교적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시인을 발굴하려 노력했고, 유진목과 하혜희의 글을 연재해 호응을 얻었다. 격월간지로 현재 11호를 준비 중이며, 문단에서 벌어진 여성 혐오 폭력 사례와 기성 문인으로부터 혐오 폭력을 당한 습작생의 목소리를 투고 받고 있다.

통영
-홍승택

네가 그것을 믿으면, 그것은 생긴다.
네. 선생님.
내가 너에게 통영에 가자고 했다.
잔이 잔을 버리는.
너는 방파제 위에서.
방파제 아래처럼 웃었다.
겨울이었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에서 회로 이동했다.
네가 뱃고동을 믿고. 뱃고동이 불었다.
이 잔을 저기로 밀어볼게.
이 잔을 저 잔으로 바꿔볼게.
모든 잔을 치우는 한 잔을.
내가 굴을 빼내서 너에게 먹여줄게.
깊으면 깊은 것이 없다고 믿으면서.
너를 돌아보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뱃고동을 반복할 텐데.
굴이 부수어지고 있다. 언제나.
성이 된 모래는 문을 만들고, 천정을 만들고.
내가 들어갈 성이다.
통영에서 보자.
난바다가 가까워지는.


▲ <더 멀리> 8호 독자 투고 선정작.

▲ 유진목, 하혜희의 신작 시가 실린 <더 멀리> 8호 목차

 

Writer

매거진 <DAZED & CONFUSED>, <NYLON> 피처 에디터를 거쳐 에어서울 항공 기내지 <YOUR SEOUL>을 만들고 있다. 이상한 만화, 영화, 음악을 좋아하고 가끔 사진을 찍는다. 윗옷을 벗은 여성들을 찍은 음반 겸 사진집 <75A>에 사진가로 참여했다.
박의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