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마음에는 양가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매력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조금만 더 나만의 반짝거림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무명의 배우가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을 때, 난 예전부터 좋아했어! 하며 괜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겠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것. 그건 남들과는 ‘다른’ 감식안을 지니고 있다는 사소한 자부심으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것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상품’은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금세 사라지고 말죠. 특히 만화처럼 빠른 주기로 순환되는 매체라면 두말할 것도 없어요.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로 절판, 혹은 영원한 품절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요즘은 절판된 만화라 해도 애장판으로 출판되거나 전자책으로 재발간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죠. 다시 접하기 힘든, 너무 재밌었던 만화들의 제목이 여럿 빠르게 떠오릅니다. 이렇게 많은 책이 절판이라뇨, 사장님!

 

<소년소녀>

후쿠시마 사토시 | 북박스 | 2003

후쿠시마 사토시의 단편집 <소년소녀>의 이야기들은 설정도 배경도 제각각이지만 주인공의 대부분은 소년이거나 소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길들의 초입에 서 있죠. 사고로 인한 살인, 끝을 향해가는 전쟁 등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뒤흔들 것 같은 사건들이 그 길을 둘러싸고 있고요. 하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그 무게와는 상관없이 계속 담담하게 걸어갑니다. 그들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생경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듭니다. 닮았으니까요, 그들의 이야기와 우리의 현실이요. 그런데 어느 에피소드 하나 모자라지 않게, 탄탄하게 그려진 이 훌륭한 단편집이 절판이라뇨?

 

<스테이>

니시 케이코 | 서울문화사 | 2005

<언니의 결혼>, <남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작가 니시 케이코의 작품입니다. 여러 주인공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얽혀있는 단편들로 구성된, 이를테면 시리즈물이라 할 수 있는 <스테이>의 주인공들은 많은 것들에 자꾸 흔들리는 고등학생들입니다. 자신의 정체성 앞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미래의 꿈을 생각하며 그들은 계속 흔들립니다. 10대를 지나쳐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겪었을 이야기들이 담담한 표정과 섬세한 대사로 그려집니다. 일본에서는 7권으로 완결이 된 이 시리즈가 한국에서는 2005년 3권까지 발매된 뒤 더이상 소식이 없습니다. 이토록 다양하고 풋풋한 성장의 이야기를, 완결까지 보여주지도 않았으면서, 절판이라뇨?

 

<헬보이>

마이크 미뇰라 | 중앙books | 2008

헬보이는 멀쑥한 슈퍼 히어로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입니다. 외모뿐 아니라 애티튜드 또한 그렇습니다. 지옥에서 건너와 스스로 뿔을 잘라버릴 근성이라면 뭐, 말 다한 거죠.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인기가 있었으니, 당연히 스테디셀러로서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요. 하긴, 영화도 처음 기획되었던 3부작 중 3편은 제작이 무산되고 말았으니, 역시 대중은 번듯하지 않은 히어로에게는 오래도록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걸까요? (얼마 전 감독과 주연배우가 바뀐 <헬보이:리부트>의 제작이 발표되었다곤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흥미진진한 시리즈가 절판이라뇨!

 

<사춘기>

이진경 | 세주문화 | 2001
이진경 | 유어마인드 | 2017

사람들이 1990년대를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SNS에서는 희화화되는 X세대처럼 재미 삼아 떠올리기도 하고, <응답하라 시리즈>의 장점이자 단점인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되기도 하고요.

<사춘기>는 90년대를 이야기하지만, 그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은 방식을 택한 만화입니다(물론 연재 시기가 90년대에 걸쳐있으니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요). 90년대에 대학을 다니게 된 네 명의 주인공이 인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주변의 많은 것들과 부딪히며 성장해나가는 서사는 어떤 수식어로 단정 짓기 힘든, 독보적인 매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연재 중이던 만화잡지 <나인>의 폐간과 함께 연재는 중단되었고, 이후 단행본 2권까지 나왔으나 이야기는 더 진전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습니다. 그 당시 주목받던 만화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비슷한 과정들을 겪었고, <사춘기> 또한 같은 그 언저리에서 과거가 되었다 생각했을 때, 굉장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완간을 목표로 절판된 1, 2권 역시 새롭게 복간된다는 이야기를요. 재출간이라뇨, 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

 

<사춘기>를 시작으로 완결되지 못한, 그리고 완결되었으나 절판되어버린 많은 작품이 다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욕심이겠지만요. 대중성보다 다양성에 조금 더 많은 배려가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이것 또한 욕심이겠지만요.

 

Writer

심리학을 공부했으나 사람 마음 모르고, 영상 디자인을 공부했으나 제작보다 소비량이 월등히 많다. 전공과 취미가 뒤섞여 특기가 된 인생을 살고 있다.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가끔 영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