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스트리트 아트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교량 아래나 터널처럼 후미진 벽에 그려진 지저분한 농담의 그래피티들보다 더 우리의 신경을 긁는 것은 학교나 기관에서 주도하는 도시 정비 사업형 벽화들일지도 모른다. 벽화가 환경미화가 된다는 주장에 반해, 저임금으로 젊은이들을 착취한다는 의견도, 어설픈 벽화가 기존의 풍경을 해친다는 비판도 있다. 사회 풍자적 작업으로 유명한 영국의 스트리트 아트 작가 뱅크시(Banksy)가 그래피티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데에는 독하도록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세련된 스타일도 주효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미적 기준을 충족해야 공감을 얻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다. 얼마 전에는 벽화로 유명한 한 마을의 거주민들이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횡포로 몸살을 앓다가 벽화를 훼손한 뉴스가 화제가 되었다. 거주민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미화’가 공동체에의 존중보다 침해에 가까울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생활하는 건물의 외관을 어떤 동의나 허락 없이 이미지로 점유해버린다는 것이 그래피티, 스트리트 아트의 핵심적인 태도라면, 정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한 한국의 수많은 ‘벽화 사업들’ 역시 특별히 미움받는 스트리트 아트의 한 갈래로 보아야 할지 모른다. 아마추어리즘도 스트리트 문화의 일부 아니었던가.

그런데, 거주민의 의사와 제도에 반해 완성된 결과물이 오히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어떨까. 그 애정은 아마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도, 보기 흉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허들을 무사히 통과한 결과일 테다. 덧붙여 수많은 관광객을 몰고 와 거주민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적정선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스트리트 아트’가 어디 있냐고? 여기 얼굴 없는 ‘인베이더(Invader, @invaderwashere)’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펴보자.

인베이더는 뱅크시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게릴라처럼 밤중에 몰래 작업을 설치하는 작가다. ‘침략자’라는 호전적인 그의 이름은 사실 일본의 타이토(Taito) 사가 1978년 출시한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에서 따왔다. 일본 출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이후 1982년 발매된 남코(Namco) 사의 <갤러그(Galaga)> 같은 아케이드 슈팅 게임 열풍의 시초라 할 만한 게임이다. 당시 낮은 비트(bit)로 구현한 거친 화상의 초기 그래픽은 작은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기술의 거듭된 발달로 30여 년이 지난 이제는 더 풍부한 색과 작고 조밀한 화상으로 실제에 가까운 게임캐릭터들이 익숙하지만, 그래서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이미지들은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라온 세대에게 특정 과거를 대표하는 그래픽 아이콘이 되었다. 인베이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의 작업들이 하나같이 귀엽고, 향수를 자극하는 이유다.

인베이더는 이 고전적인 캐릭터들, 간략하고 단순하게 몇 개의 픽셀로 이루어진 그래픽을 세라믹 타일을 이용한 모자이크로 구현한다. 1998년부터 구상해 프랑스 파리 시내에 설치하기 시작한 이 캐릭터들은 이내 파리 시내에만 1,000개가 넘게 자리를 잡았다. 크기와 색, 모양은 개수만큼 다양하다. 설치 지역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프랑스를 넘어 아프리카 초원의 사파리, 심지어 국제우주정거장(ISS, 2015년)에도 부착했다. 2016년 10월 기준으로 67개 도시를 3,386개의 인베이더들이 ‘침략했다.’ 물론 우주정거장에 설치한 인베이더는 손바닥만 한 사이즈이지만, 큰 것은 건물의 한 면을 뒤덮는 사이즈들도 있다. 한국에도 있다. 2009년 대전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전에 초청되어 미술관과 그 주변에 설치한 인베이더들은 전시 종료 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다. 이런 ‘침략’의 기록들은 작가 홈페이지에서 실시간 맵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세계 곳곳의 인베이더들을 포착하면 점수를 획득하는 게임 앱도 출시해 이 ‘침입 게임’에 동참할 수 있다. 핸드폰 카메라로 이들을 촬영하고 게임 스코어를 올리는 방식은 최근 증강현실을 이용한 게임(<포케몬 고> 같은) 붐과 맞물려 독특한 감상을 느끼게 한다.

이들은 도시 곳곳에서 이목을 끌지만, 카메라를 맨 관광객들을 특정 장소로 몰리게 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권윤주가 펴낸 책 [파리의 스노우캣](안그라픽스, 2004년)에서 파리의 인베이더들을 언급하여 이들은 한국에도 알려졌는데, 여기서 저자는 이 작업의 특징으로 “벽에 이런 타일 조각을 붙일 때 그 주위 환경이나 분위기, 색깔과도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꼽았다. 도시의 골목이나 건물,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녹아드는 색과 형태의 배치는 당연하게도 작가가 현장을 답사하고 미리 스케치하여 타일을 배치해 설치한 덕분이다. 건물에 직접 타일을 부착하는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고민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또 파리라는 도시는 작가가 주로 활동했던 익숙한 곳이다. 본격적인 활동의 초반, 이곳에 수많은 작업을 설치하는 일은 전 지구적 침략을 계획하기에 유리한 전초기지에서 주변환경과 작업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곱씹을 수 있는 연습이 되었을 것이다. 도시를 지탱하는 기술 일부가 물리적으로 돌출되는 CCTV를 그래픽 도트로 감싼 듯 연출하거나 과학기술의 정점이라 할 우주정거장에 작업을 설치한 사례는 그의 연출 감각이 돋보이는 경우다.

그러나 이들의 ‘침략’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보기는 어렵다. 1998년 루브르박물관에 잠입해 타일 모자이크를 설치하며 제도 비판적인 시도를 보여준 바 있으나 이후 인베이더의 행보는 사회 비판적이거나 급진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주정거장 및 유럽우주기구(ESA)의 7개 지상기지에 작업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는 ESA의 제안으로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ESA의 협력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 외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 한국 등의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초청, 지원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대규모인 작업을 설치한 경우도 다수 보인다. 그 자신은 “1% 합법(legal)” 설치라고 칭하는 작업들이다. 그의 작업 대다수도 일상 공간을 공세적으로 침략한다기보다, 틈입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정치적으로 탈색된 친숙하고 유쾌한 컨셉 덕분이다. 이 귀여운 침략자들에게는 어떤 무시무시한 의도가 없다. 이들은 대체로 작고 무해하게 부착되어 있을 뿐이다. 뱅크시의 강렬한 메시지들은 그의 작업들이 상품화되면서 본래의 성격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작가 본인도 이 현상을 패러디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반면 인베이더는 자신의 작업을 뜯어 판매하려는 이들에게 본인이 운영하는 ‘스페이스 샵(Space Shop)’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상점을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인베이더 키트(kit)>를 판매한다. 이것을 구매하면 직접 작가와 같은 타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 원하는 곳에 설치할 수 있다. 이 보기 좋은 인베이더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어느 쪽에서 참고하면 좋을까. 유희와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본래의 발상에 충실하지만 높은 이상이나 대의가 없는 침략자들을 마주할 때, 스스로 상품화의 길을 유쾌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이들을 여전히 침략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도 컨셉 게임의 일부일 지 모른다. 이 정도로 예쁘고 발랄한 침략이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도시의 회색 담벼락을 이발소 그림으로 뒤덮는 ‘미화’보다야 이런 ‘침략’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베이더 인스타그램
인베이더 홈페이지 

메인이미지 출처 @invaderwashere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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