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7년 6월 9일, 22살의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았다. 그는 다음 날로 예정되었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규탄과 호헌 철폐 국민 대회’ 참석을 결의하는 집회(‘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하던 중이었다. 최루탄을 피하고자 연세대학교 교문 안쪽으로 피하던 이종창(연세대 86학번)이 쓰러진 이한열을 발견하고 일으켜 부축했다. 그날 경찰이 쏜 최루탄은 평소처럼 진압용으로 쏘아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겨냥하여 직사한 것이었다. 피격되어 피 흘리는 청년과 그를 부축하는 또 다른 청년의 처참하도록 생생하고 고발적인 한 장의 사진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바꿨다.
두 사람을 촬영한 사진가는 당시 로이터 통신의 사진기자였던 한국인 정태원이다. 로이터의 최초 보도에 기재된 사진의 제목은 단순했다. ‘학생 한 명 사망’. 이후 사진은 중앙일보를 비롯한 다른 신문에 널리 실리면서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약 한 달 뒤인 7월 5일, 이한열이 사망했다. 7월 9일에 서울 시내에서 광주까지 이어진 장례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함께했다.
2017년 5월에 미국인 사진작가 네이선 벤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시위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그와 인터뷰한 한겨레에 따르면, 그의 방한은 88올림픽을 맞이한 것으로 당시 격렬했던 시위 현장을 찾은 것도 우연이라고. 연대 앞 굴다리에 사진기자들이 붙어 서는 날이 많은 시절이었다. 네이선 벤의 증언에 따르면 연대 앞 굴다리는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연세 해변(Yonsei Beach)’이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의 사진기자였던 그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 측에 사진을 제공했다. 사진 속에는 피격 직전과 직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식별 가능한 정도로 정확히 보인다.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은 단지 이 사진에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포착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세대학교가 오랫동안 입구를 지켜왔던 신촌 캠퍼스 정문의 풍경을 바꾸기로 한 것은 지난 2014년의 일이다. 이한열 열사가 이종창 씨의 부축을 받는 사진이 촬영된 곳은 교문에서 본관을 잇는 직선로인 ‘백양로’. 공사가 2014년 시작되었다는 것은, 공사 시작 전까지 연세대학교의 정문 풍경이 이 30년 전의 사진과 거의 일치했다는 의미다. 정문은 물론 정문 너머로 펼쳐진 교내 화단 조경의 풍경은 마치 고작 몇 년 전의 모습처럼 보인다. 연세대학교 동문뿐만 아니라, 주변에 살았거나 이 풍경을 눈여겨본 적이 있는 그 누구라도 이 오래된 사진이 여전히 가진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사진 속의 깃발들도 낯설지 않다. 어떤 단체들은 저 시기에 제작된 것과 비슷한 폰트로 단체 이름을 인쇄한 깃발을 여전히 사용하기도 한다. 2015년에 극적으로 찾았다는 연세대 화학공학과 깃발과 비슷한 크기의 붉은 깃발도 보인다. 깃발은 열사의 피습 직후 그를 부축하는 과정에서 열사의 피가 묻어 잘 보존되어 오다가 중간에 분실된 적이 있다. 지금은 전시실에 잘 보관되어 있다. 요즈음 복고풍의 패션이 유행해서인지, 당시 학생들의 차림새에서 뚜렷이 세월을 느끼기도 힘들다.
별 설명 없이 이 사진을 보았다면, 그것도 흘깃 보았더라면 언제적 사진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를 담은 일련의 사진들은 잘 보존된 선명한 색과 형태는 물론 세련된 화면 구성도 보여준다. 흑백이나 인쇄물로 반복적으로 복제되는 과정을 거치며 열화되는 사진들 틈에서 살아남은 이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사진은 역사적 아이콘으로 남은 열사의 이미지를 보다 가까이 끌어당기고, 세월 사이의 거리가 실제로 좁혀진 듯한 효과마저 낳는다. 2017년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앞에서 집회를 하던 스물두 살의 대학생이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떠오르는 일이 자꾸 더 많아지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