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스틸컷

영화 <밀정>을 본 관객들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하시모토 역을 잊지 못할 것이다. 허스키한 저음과 매서운 눈빛의 배우 엄태구다. 그의 존재감은 주연 송강호와 특별출연한 이병헌의 그것 못지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간 거쳐온 다수의 영화 속에서도 그는 늘 강한 인상을 남겨왔다. 한결같은 표정이지만, 엄태구는 그 굳은 듯한 얼굴과 눈빛만으로 분노로 가득 찬 인물부터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인물까지 전부 소화한다. 영화 <차이나타운>(2014)에서 무뚝뚝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일영(김고운)을 향한 마음을 보여주고, <베테랑>(2015)에서 조태오(유아인)의 이종격투기 경호원을 맡은 그의 눈빛은 권선징악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차이나타운>(좌), <베테랑>(우) 스틸컷

한편 그는 영화 <잉투기>(2013)에서 태식 역을 맡아 다른 영화와는 사뭇 다른 ‘찌질한 잉여’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내기도 했다. 신선한 스토리로 독립영화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은 <잉투기>의 감독은 엄태화로, 바로 엄태구의 친형이다. 이 형제의 협업은 단편영화 <유숙자>(2010)에 이어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은 단편영화 <숲>에서 먼저 빛을 발했다. 각각 제 분야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온 엄태화-엄태구 형제는 제2의 류승완-류승범 형제를 예고하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트 바이브레이터>

Heart Vibrator, 2011ㅣ11분ㅣ감독 엄태화ㅣ출연 엄태구, 홍석재, 류혜영

엄태화 감독의 단편영화 <하트바이브레이터>에서는 다소 풋풋한 엄태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11년 한국영화아카데미 28기 단편제작 실습작으로, 엄태구를 비롯해 다른 익숙한 얼굴들도 눈에 띈다.

발레 부장인 태구(엄태구)에게 발레부 지원서를 들이민 석재(홍석재)는 곧장 테스트를 받게 된다. 그러던 도중 지혜(류혜영)가 불쑥 발레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다. 석재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하다. 이윽고 태구를 사이에 둔 석재와 지혜 사이에 미묘한 감정싸움이 시작된다.

<하트 바이브레이터> 예고 영상

엄태구를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석재 역은 최근 <소셜포비아>를 통해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 홍석재 감독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보라 역으로 익숙한 배우 류혜영의 앳된 모습도 보인다. 영화계에서 먼저 탄탄한 이력을 쌓아온 류혜영은 <하트바이브레이터>로 엄태화 감독과 처음 만난 후, 이어 단편영화 <숲>(2012), <잉투기>(2013)에서 엄태화-엄태구 형제와 꾸준히 호흡을 맞췄다.

 

+ 필모그래피에 없는 엄태구의 존재감, <빛이 좋은 시간> 
2009ㅣ15분ㅣ연출 이정민ㅣ출연 엄태구, 김영철(김세원), 정원식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작품으로, 7년 전이지만 엄태구의 존재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단편영화다. 무거운 분위기, 대사 몇 마디 없는 영화 속에서 단연 엄태구의 표정과 눈빛만이 내용과 감정을 함축하고 있다.

단편영화 <빛이 좋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