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윈 픽스>의 30번째 에피소드이자 시즌 2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로라 파머가 데일 쿠퍼에게 25년 후에 만나자고 말하는 장면. 이것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트윈 픽스(Twin Peaks)>는 1990년부터 1년 동안 방영된 미국의 30부작 텔레비전 드라마다. 작은 마을에서 로라 파머(Laura Palmer)라는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고, 이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특이한 점은 우선 이 시리즈의 감독이 바로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David Lynch, 1946~)라는 사실, 고작 1년 동안 방영되었음에도 엄청난 인기와 붐을 몰고 왔다는 점, 그리고 무려 25년이 지난 2017년 5월 그 후속 시즌(시즌 3)이 방영된 바 있다는 것이다. 감독 데이빗 린치와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Mark Frost, 1953~), 오리지널 캐스트 대부분이 시즌3에 참여하였고, 2017년 5월 21일에 프리미어 방송 후 18부작을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트윈 픽스>는 시청자들을 25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마저 시리즈의 열광적인 팬으로 만들어왔다. 25년 전의 <트윈 픽스>를 슬쩍 돌아보기로 한다.

<트윈 픽스> 시즌3 트레일러. 오리지널 캐스트들의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카일 맥라클란, ‘데일 쿠퍼 요원’

데일 쿠퍼 요원의 커피 사랑은 유명하다. 지난 시즌의 커피 장면들을 편집해 만든 쇼타임(Showtime)의 예고편

데이빗 린치가 꼽은 좋아하는 배우, “어쩌면 내 분신”이라고 일컫기까지 했던 배우, <트윈 픽스> 이전부터 데이빗 린치의 페르소나였던 지적인 배우. 카일 맥라클란(Kyle MacLachlan)은 특유의 부드럽고 선한 얼굴과 밤색 머리, 단정한 검은 수트 차림으로 트윈 픽스에 등장했다. FBI 요원인 그는 로라 파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트윈 픽스로 파견되었다. 어쩐지 도시 깍쟁이나 괴팍하게 묘사되는 일이 많은 FBI 요원이지만, 그는 모두에게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좋은 사람이다. 트윈 픽스의 아름다운 자연, 소도시에 아직 살아 있는 ‘인간다운’-혹은 ‘미국이 잃어버린’-가치를 사랑하는 선한 남자 데일 쿠퍼(Dale Cooper)가 더블 알(RR) 커피숍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그에게 반했다. 그래서 FBI 요원이면서도 “암호를 해독하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유리병을 돌로 맞추는 것으로 범인을 찾으려고 할 때도 주변 사람들은 도넛과 커피를 챙겨서 더없이 진지한 쿠퍼 요원의 기이한 수사 방침에 따른다. 쿠퍼 요원의 말에 따르면 그가 수사에 동원한 방식들은 “FBI 수사 방침은 물론, 추리, 티베트식 방법, 직관, 운, 그리고 마술”에 이를 정도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그는 분명 능력 있는 수사관이자, <트윈 픽스>를 향한 여정의 유쾌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닥치는 시련들이 특히 더 가슴 아프거나 충격적이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여전히 검은 슈트에 앞머리를 얌전히 붙이고 멋진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건 위로가 되는 일이다. “정말 맛있는 커피 한 잔(a damn fine cup of coffee)”을 손에 들었다면 이제 그를 따라 트윈 픽스에 갈 준비가 된 것이다.

 

1990년 방영 당시 <트윅 픽스> 오프닝 영상. 트윈 픽스를 둘러싼 자연과 제재소의 공정, 자연물과 도로 등이 등장하는 영상은 당시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 크레딧 영상과 비교해도 파격적이다. 음악과 함께 단순하고 삭막한 풍경이 한눈에 보여주는 미스테리하고 언캐니한 정조는, 이후 <엑스파일(The X-Files)>(1993~2002) 시리즈처럼 우울하고 비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추리, 수사극이나 오컬트적인 드라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을 받는다

1990년 방영 당시 <트윅 픽스> 오프닝 영상. 트윈 픽스를 둘러싼 자연과 제재소의 공정, 자연물과 도로 등이 등장하는 영상은 당시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 크레딧 영상과 비교해도 파격적이다. 음악과 함께 단순하고 삭막한 풍경이 한눈에 보여주는 미스테리하고 언캐니한 정조는, 이후 <엑스파일(The X-Files)>(1993~2002) 시리즈처럼 우울하고 비관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추리, 수사극이나 오컬트적인 드라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을 받는다

트윈 픽스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미국답게 무척 울창하고, 거대하다.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봉우리(Twin peaks)를 중심으로 마을의 가장자리를 감싼 능선은 삼림으로 빽빽하고, 이 오지 산골 동네를 오가는 트럭들은 대부분 벌목한 삼나무를 옮기기 위한 차들이다. 숲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마을의 고용을 책임지고 있는 패커드(Packard) 제재소는 그래서 탐욕 때문에 갖가지 술수가 펼쳐지는 장이 되기도 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나무 향기는 주로 ‘더글러스 전나무’의 것으로 묘사된다. 데일 쿠퍼 요원이 칭송하는 나무이자, 실제로 데이빗 린치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 수종이라고. 린치는 미국 북서부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농무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 숲에 자주 갔다고 한다. 곳곳에 감독의 경험과 성격이 녹아 있지만, 무엇보다도 트윈 픽스를 둘러싼 숲은 “유령 숲”이라 불릴 만큼 어둡고 두려운 곳이기도 하다.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아무도 모르는 인간 속의 어둡고 음침한 악이 기지개를 켜고 범죄가 일어나는 곳, 그리고 언제나 마을 곁에 조용하고 거대하게 웅크리고 있는 곳이 바로 숲이다. 극 중 나무와 숲이 등장할 때면 긴장감이 흐르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화면을 세로로 ‘댕강’ 분할하는 시각적 효과, 인물과 자연 간의 압도적인 크기 차이, 극적인 어둠과 빛의 대비 등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카페 ‘더블 알(RR)’

카페 RR의 두 미녀, 노마 제닝스와 셸리 존슨

검은 숲과 불길한 사건들, 음모와 소문이 가득한 트윈 픽스이지만, 이 커피숍이자 다이너인 작은 가게 ‘더블 알’만큼은 동네에서 가장 화사한 색감을 자랑한다. 마을의 소문난 미녀들이 운영하는 곳인 데다 가장 맛있는 커피와 체리 파이를 판매하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더블 알은 데이빗 린치가 전작 영화 <블루벨벳(Blue Velvet)>(1986)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국 변두리 시골 마을의 친밀하고도 위선적인 특유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곳이다. 크림과 오렌지, 갈색 등 따뜻한 색조를 중심으로 한 인테리어, 파스텔 톤의 집기와 유니폼, 금발에 미인인 사장과 매력적인 점원, 서로에게 친절한 동네 사람들, 테이블에 꽂힌 꽃과 소박한 장식이 가득하게 보이는 더블 알은, 팝 문화와 당시 유행하던 소프오페라(soap opera, 텔레비전 드라마의 장르)의 붐, 코미디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배경이다. 언제나 웃음만 가득하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근심걱정이 따르게 마련. 더군다나 <트윈 픽스>에서라면, 불운과 슬픔이 깃들지 못할 곳이 없다.

 

빨간 방

미국의 재즈 가수 지미 스캇(Jimmy Scott)이 빨간 방에서 부르는 ‘Sycamore Trees’. 가수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환상적이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증폭시킨다. 노래는 <트윈 픽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대부분이 그렇듯 바달라멘티가 만들었고, 작업 과정에 린치가 깊이 관여하였다

‘빨간 방’은 이제 <트윈 픽스>를 넘어 데이빗 린치의 상징물처럼 여겨질 정도다. 빨간 방은 극의 곳곳에 등장한다. 주로 중요한 단서를 건네는 쿠퍼 요원의 꿈속 배경을 두고 빨간 방이라고 일컫지만, 타락한 인간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매음굴의 인테리어, 범죄가 일어나는 오두막에 드리운 붉은 커튼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빨간 방은 린치의 각본이 가진 즉흥적 성격에 따라, 이미 1화의 편집이 모두 끝난 상황에서 구상되어 극에 추가되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저녁 6시 반쯤 주차장에 서 있던 따뜻한 자동차의 지붕에 손을 얹고 있는 사이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커튼이 드리운 방은 그가 명상할 때 떠올리는 풍경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색깔은 의식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트윈 픽스>에서 빨간 방은 꿈과 직관, 신비의 영역이자 고통과 악몽의 공간으로 형상화되었다. 무엇보다 빨간 방은 ‘항상 음악이 흐르는 곳’이다.

<트윈 픽스>의 미스테리한 정조를 완성하는 것은 작곡가 안젤로 바달라멘티(Angelo Badalamenti, 1937~, 데이빗 린치와 영화 <블루벨벳>,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을 함께 작업)의 음악. 특히 빨간 방에 흐르는 음악과 음성 사운드는 오컬트와 지성이 뒤섞인 초감각의 영역에서 쿠퍼 요원이 겪게 되는 감정들을 극대화한다. 빨간 방의 바닥 무늬는 빨간색과 함께 <트윈 픽스>를 상징하는 패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빨간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기괴함은 거의 두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바달라멘티는 시즌3을 위해 새로운 곡을 준비하기도 했다.

 

살인자 밥(Bob)

이전 시즌에 등장한 밥의 모습. 잘 꾸며진 중산층 가정인 로라 파머의 집 구석구석에서 누군가를 향해 악몽처럼 튀어나오는 밥의 모습은 영상으로 볼 때 더욱 소름 끼친다

악당 밥(Evil Bob, Robert)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무척 기괴하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밥은 시청자와 극 중 인물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거울에 비친 작은 모습으로 섬뜩한 인상을 남겼다. 푹 꺼져 짐승처럼 번득이는 큰 눈, 길게 기른 흰 머리와 과장된 몸짓, 데님 패션으로 이제는 유명한 악당이 된 밥을 연기한 배우는 프랭크 실바(Frank Silva)다. <트윈 픽스>의 파일럿(1화) 촬영 당시 프랭크 실바는 드라마의 의상 담당자였다. 로라 파머의 집을 촬영하던 중 가구를 옮기던 프랭크 실바가 데이빗 린치의 눈에 띄었다. 데이빗 린치는 그때 각본에 없었던 악당이자 사악한 영혼인 밥에 대한 아이디어를 프랭크 실바로부터 떠올린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던 실바는 이토록 인상적인 역할로 <트윈 픽스>에서 데뷔하고, 드라마의 스핀오프 영화인 <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에도 같은 역으로 출연한다. 안타깝게도 프랭크 실바는 1995년 지병으로 사망, 고인이 되어 시즌 3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Caption<트윈 픽스> 시즌3 제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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