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신 인형인 ‘바비(@barbie)’의 제조사 ‘마텔(Mattel)’이 2016년, 출시 57년 만에 바비의 신체 규격을 다양화한 모델들을 내놨다. 이제 기존 바비에 키가 크고, 작고, 플러스 사이즈인 세 가지 모델이 더해졌다. 체형의 추가 외에도 7가지 피부색, 22가지 눈동자 색, 24가지 헤어스타일과 새로운 옷, 액세서리를 함께 출시했다.

1959년 첫선을 보인 이후 여성 신체 이미지의 이상형으로 전 세계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바비지만, 바로 그 이유로 비난의 여론이 언제나 뒤따랐다. 바비의 상징은 금발, 큰 가슴과 대비되는 가느다란 허리와 날씬한 팔다리, 푸른 눈이다. 실제 여성 신체와는 동떨어진 바비의 이미지가 어린이들에게 신체에 관한 왜곡된 관념을 심어주므로 부적절하다는 비난과 함께, 바비가 제시하는 사회에서의 성 역할이 가정에만 국한되거나 수동적 여성성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한다는 문제도 제기되어 왔다. 또 시장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로 확대되었음에도 다양한 인종의 모델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받았다. 이에 마텔사(社)는 1960년대 후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흑인 인형을 출시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다른 인종 이미지를 제작해왔으며, 또 바비가 지난 57년간 우주인부터 미국 대통령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쳐왔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금발의 바비가 바비인형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해왔고 또 이를 이용해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제조사도 소비자도 안다. 바비는 그저 인형이 아니라 강력한 아이콘이다.

이 아이콘의 변화 선언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2016년 2월 바비는 “이제 내 몸에 관한 이야기 좀 멈출 수 있을까요? (Now can we stop talking about my body?)”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TIME> 지 표지를 장식했다. 이 기사는 변화의 요인으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의 헤로인 ‘엘사(Elsa)’를 비롯한 디즈니 공주 상품들의 출시 권한을 경쟁사인 ‘해즈브로(Hasbro)’에 넘기게 되고, 성별에 국한하지 않는 다른 장난감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지난 2년간 마텔사의 매출이 감소했음을 지적한다. 또 킴 카다시안, 비욘세 같은 깡마르지 않은 글래머러스한 뷰티 아이콘들이 대거 출현하고 대중의 신체에 관한 미적 기준이 과거보다 다양해진 점, 진보적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세대 어머니들의 등장 등으로 그 배경을 진단했다. 그렇다면 이제 금발의 전형적인 바비는 과거의 아이콘이 될까? 아마 그런 날이 당장 도래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바비를 사랑한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 고객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직 전체 바비 구매자 중 소수다. 색종이와 헝겊 조각으로 옷을 입히고 샴푸로 머리를 감기며 놀던 어린 시절의 동반자로 바비를 기억하는 많은 어머니가 딸에게 바비를 선물한다. 아직 다양한 체형과 인종의 바비가 출시되지 않은 한국의 대형마트에서는 아늑한 핑크색 드림하우스에서 친구들과 티타임을 갖는 흰 피부와 금발의 바비를 언제나 만날 수 있다. 그 곁에는 바비를 모방한 마론인형들이 즐비하다. 바비는 언제나 당대의 유행 패션, 헤어스타일, 메이크업을 반영한 완벽한 외모의 젊은 여성을 모델로 해왔다. 이렇게 브랜드 이미지가 확고한 상황에서, 배가 볼록하고 플랫슈즈를 신은 동양인 바비도 바비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TIME> 지도 지적했듯, “세상 사람들이 눈을 감고 바비를 생각할 때, 그들은 특정한 신체를 본다.”

바비가 만들어온 여성 신체의 이상화된 이미지는 건재하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바비 같다”고 감탄한다. 몇 년 전 ‘살아있는 바비인형’으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던 우크라이나 여성 발레리아 루키야노바(@valerialukyanova)는 얼굴과 신체의 성형과 화장 기술을 이용해 그야말로 바비를 자신의 신체에 구현해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비하와 찬양의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얻고 싶을 정도로 바비는 오랫동안 신체의 이상형으로 여겨졌지만, 막상 신체에 그 이미지가 구현되는 순간, 사람들은 바비가 얼마나 이상화되었는지 깨닫는다. 좁고 작은 코,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눈, 작은 턱, 풍만한 가슴과 대비되는 가느다란 허리가 비현실적이고 어색하다는 것은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비인형 같은 외모를 얻기 위해 수술을 감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해외토픽으로 접할 수 있다. 이들을 단순한 괴짜로만 취급하기엔 미녀에 관한 사회적 상(像)이 너무 확고하다.

사회적 이상으로서 바비가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함은 역으로 그 강력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성의 스테레오 타입과 고착된 성 역할을 과장하여 비틀며 재현하는 ‘드래그퀸(Drag Queen)’의 세계에서 바비를 비롯한 마론인형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방영한 드래그퀸 콘테스트 리얼리티쇼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RuPaul’s Drag Race)> 7시즌 출연자인 트릭시 마텔(@trixiemattel)은 바비 컨셉으로 유명한 드래그퀸이다. 그는 본인의 드래그 네임에 아예 바비의 제조사명 ‘마텔’을 붙이고 금발, 풍성한 속눈썹과 두꺼운 입술과 광대뼈를 강조한 화장에 핑크 드레스를 입는다. 할리데이비슨의 도시, 위스콘신 주 밀워키 출신인 그는 어려서 바비를 갖지 못해 바비가 되기로 했다는 컨셉을 갖는다. 화려한 꾸밈새와 노래 실력 따위로 화제를 모은 그는 시즌 초반에 탈락했음에도 중간에 재등장하여 다시 도전을 이어간 최초의 드래그퀸이다. 트릭시 마텔의 드래그 쇼 단골 레퍼토리는 물론 덴마크 출신 혼성그룹 아쿠아(Aqua)의 1997년 히트곡 ‘바비 걸(Barbie Girl)’이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바비와 그의 남자친구 인형 ‘켄’은 지금과 비교해도 다르지 않은 풀장이 딸린 드림하우스와 핑크 컨버터블을 배치한 세트에서 수동적이고 세속적이며 성적으로 대상화된 ‘백치 금발’ 바비의 모습을 그렸고, 때문에 이 곡을 출시한 레코드사가 마텔사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2002년 마텔사가 제기한 모든 소송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는데, 이 사건이 정말 해프닝이 된 것은 이후 공식적인 바비 홍보에 이 곡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텔사가 2009년 같은 곡을 사용한 새로운 안무와 구성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사건이 자기 희화화의 해프닝으로 보여지듯이 ‘바비 같다’는 찬사 뒤에는 멍청한, 수동적인, (외모 이외에는) 무능하고 얄팍한 존재라는 비하도 한 자리 차지한다.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금발이 너무해> 시리즈는 이런 이중적 잣대를 비튼 영화다. 주인공 ‘엘 우즈’는 대책 없이 긍정적인 금발 미녀로 핑크색 옷과 액세서리를 걸친 바비의 인간 판이다. 2000년대 디즈니에서 출시한 TV 영화 시리즈에서, 평범함을 내세우지만 결국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들은 자신의 인간성과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였고, 그 이전에는 마돈나, 데보라 해리, 코트니 러브 같은 금발 아이콘들이 있었다.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동시에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받기 위해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는 것은 마치 금발 미인의 숙명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누군가 이 도전에 성공하더라도 변화는 아주 천천히 찾아온다. 엘 우즈가 통념을 비틀며 인기를 얻었지만, 직후 미국에서 급부상한 금발 아이콘은 힐튼 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다. 그의 리얼리티쇼가 전미를 휩쓸며 이 제멋대로에 망가진(spoiled) 바비 이미지는 두터운 비난과 선망 속에서 소녀들의 인기를 얻으며 다시 트렌드가 됐다. 자신의 무지와 세속적 욕망을 과시적으로 드러낸 이 ‘바비 걸’이 결국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한 홀림수(gimmick)에 불과했다는 뒷이야기는 도시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격변하는 아이콘들의 변화는 그러나 남성들의 그것만큼이나 여성들의 욕망 또한 수치스럽거나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시대적 메시지를 조금씩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8년 ‘뮬란’이 칼을 들고 싸우기 시작한 이래 디즈니의 전형적인 여성 주인공들의 행동양식도 달라져 왔다. 2013년 <겨울왕국>이 끌어낸 기록적인 열광은 기존 여성성의 틀에 갇히지 않는 진보적 여성 모델이 상업적으로도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졌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어린이들은 바비의 핑크색보다 엘사의 파란색에 열광한다. 여전히 금발의 백인으로 드레스 차림인 모습이지만, 엘사는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감동적 서사로 구체적인 설득력을 획득한 캐릭터다.

2016년 바비는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You can be anything)”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하지만 57년간 바비가 여섯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유한 캐릭터의 설득력이 부재한 하나의 이미지-아이콘으로서의 바비가, 쏟아지는 다른 캐릭터들의 도전으로부터 살아남아 얼마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어쨌든 의미 있는 사실은 이제 바비도 변화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바비 인스타그램
발레리아 루키야노바 페이스북
트릭시 마텔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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