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이후 명맥이 끊긴 로망포르노가 2016년을 기점으로 돌아왔다. 일본의 개성 있는 감독 5인은 로망포르노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탈바꿈해 내놓았다. 일본에서 다시 반향을 일으킨 ‘로망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영화를 온라인에서 만나보자.

 

로포리 프로젝트

‘로포리 프로젝트’는 ‘로망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ROMAN PORNO REBOOT Project, ロマンポルノリブートプロジェクト)’를 줄인 말이다. (로망포르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인디포스트> 기사 ‘배우 하야시 유미카를 둘러싼 로망포르노 작품들’ 참조) 로망 포르노(Roman Porno)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일본 영화계는 황금기인 1950~60년대를 지나 1970년대 침체기를 맞는다. 대형 영화 산업의 틈에서 자생하던 독립 영화사의 에로 영화, 이른바 ‘핑크 영화’가 도산 위기를 맞은 메이저 영화사 닛카츠(日活)의 특별한 방침을 통해 일본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진출한다. 닛카츠에서 보유한 인력과 영화기술을 바탕으로 저예산 로망 포르노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지킬 것은 오직 하나, 일정 시간의 야한 장면만 있으면 어떤 영화를 만들든 상관하지 않았다. 주제는 연애와 성애에 그치지 않고, 공포, 판타지, 정치로 번졌다. 재능 있는 감독 지망생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었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데뷔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로망 포르노물은 높은 인기를 누리며 10년 넘게 일본 영화 산업을 이끌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데뷔작 <간다가와 음란전쟁(神田川淫乱戦争)>, 수오 마사유키의 데뷔작 <변태 가족 형의 새 각시(変態家族 兄貴の嫁さん)>도 이 시기에 나왔다.

일본 영화사에서 사라졌던 로망포르노 장르가 부활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공백기를 포함하여 제작 45주년을 맞아 닛카츠는 다섯 명의 중견 감독에게 다시금 로망포르노를 만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소노 시온은 ‘예술’, 나카타 히데오는 ‘레즈비언’, 시오타 아키히코는 ‘싸움’, 유키사다 이사오는 ‘로맨스’, 시라이시 가즈야 감독은 ‘사회’라는 각자의 키워드를 가지고 로망포르노의 규칙을 지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일주일 만에 완성된 다섯 편의 영화는 화려하게 로망포르노의 부활을 알렸다.

 

21세기 로망포르노, 키워드는 여성

닛카츠의 사장은 리부트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를 여성이라고 밝혔다. 2012년 일본과 뉴욕, 유럽 등지에서 닛카츠 100주년 기념 로망포르노 상영회를 열 때 젊은이, 특히 여성 관객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지난 시간 동안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변했기에 ‘로망포르노’도 변해야 한다는 의제를 던졌다. 2016년 만들어진 5편의 작품은 그간 성인영화에서 간과해온 몇 가지 화두를 강렬하게 투사한다. 남성 감독만이 참여한 점은 여전히 아쉽지만 ‘로망포르노: 리부트’는 남성이 여성을 소비하는 것이라는 포르노의 정의를 여성이 소비하는 남성, 여성이 결정하는 가치 파괴와 탄생의 인식 체계를 전환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안티 포르노>

ANTIPORNO ㅣ 감독 소노 시온 ㅣ 토미테 아미, 츠츠이 마리코 외 ㅣ 76분 ㅣ 청소년관람불가

소설가로서 각광을 받는 여자 ‘쿄코’. 그녀는 화려한 방에 틀어박혀 매니저인 노리코가 알려주는 일정을 분 단위로 소화한다. 나는 쿄코인가? 쿄코를 연기하는 것인가?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쿄코의 과거와 관련된 비밀이 하나둘 드러난다.

소노 시온 감독은 리부트 프로젝트 제안을 받고 처음엔 거절했다. 지금껏 작품에서 강렬한 에로스를 그려왔던 그는 굳이 ‘포르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계속되는 제안에 ‘안티 포르노’를 계획했고, 가제인 안티 포르노는 가장 문제적인 작품 <안티 포르노>로 완성됐다. 영화 업계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고민하며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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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릴리>

White lily ㅣ 감독 나카타 히데오 ㅣ 아스카 린, 야마구치 카오리 외 ㅣ 80분 ㅣ 등급 미정

상처받은 서로의 과거를 위로하며 함께 살아온 두 여자. 그녀들의 비밀에 끼어든 남자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이 폭주를 시작한다. 공포 영화의 대가 나카타 히데오 감독이 레즈비언 세계에 도전하여 왜곡된 사랑의 끝에 선 여자들의 궁극의 순애보를 그려낸다. <링>의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에로틱한 가운데 자신만의 공포 영화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영화 <링>으로 유명한 나카타 히데오 감독은 꿈에 나올까 무서운 SM 로망포르노 <상자 속의 여자>를 감독한 코누마 마사루의 팬이며 조감독으로 함께 일하기도 했다. 2000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새디스틱 마조히스틱>를 통해 코누마 마사루가 영화를 찍을 때 얼마나 친절하고 악랄(?)한지 밝힌 바 있다. 다큐멘터리 상영 당시 많은 여성 관객이 찾은 걸 보고 여성들이 로망포르노를 보며 고민하고 동조하며 판단하는 지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리부트 프로젝트에서 나카타 히데오는 레즈비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화이트 릴리: 백합>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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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젖은 여자>

Wet Woman in the Wind ㅣ 감독 시오타 아키히코 ㅣ 마미야 유키, 나가오카 타스쿠 외 ㅣ 77분 ㅣ 청소년관람불가

도시의 떠들썩함을 피해 산장에서 살아가는 초식남 ‘타카스케’는 야성미 넘치는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 ‘시오리’를 만나며 욕망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욕심을 버리기로 했던 남자, 욕심 앞에 솔직한 여자. <환생>과 <도로로>의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이 본능을 감추지 않고 달아오르는 남자와 여자의 싸움을 가볍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전격 츤데레 영화 <달빛 속삭임>을 만들었던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은 <바람에 젖은 여자>로 다시 한번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바람에 젖은 여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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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Aroused by Gymnopedies ㅣ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 ㅣ 이타오 이츠지, 아시나 스미레 외 ㅣ 81분 ㅣ 청소년관람불가

잘나가던 영화감독에서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삼류 감독으로 전락한 후루야는 피부의 온기를 갈망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방황한다. 일, 명성, 그리고 사랑.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다다른 곳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러브 스토리의 대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안타깝고 서투른 사랑을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담아 관능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6명의 여자와 6번의 섹스를 하는 남자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시선이 돋보인다.

순애보 영화의 달인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처럼 여성이 남성을 구원한다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시나리오를 썼다. 닛카츠는 만족해하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에게 여성 작가와 프로듀서를 붙였다.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는 여성이 남성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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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고양이들>

Dawn of the Felines ㅣ 감독 시라이시 카즈야 ㅣ 이하타 주리, 미치에, 마우에 사츠키 외 ㅣ 84분 ㅣ 등급 미정

이케부쿠로의 밤거리를 떠도는 세 여인. 불려 나온 남자들과 몸을 겹치며 또 하루의 밤을 보낸다. pc방 난민, 미혼모, 불임증. 각각의 고민을 안고 내일을 향해 살아가는 현대 동경 여자들의 군상 드라마. <흉악>과 <일본에서 가장 나쁜 녀석들>의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은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여인들의 현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회파 성격을 띠는 작품.

시라이시 가즈야 감독은 로망포르노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다룬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한 적 있다. 리부트 작품 <암고양이들> 또한 가난한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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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도자료 아트나인
사진 동영상 http://www.nikkatsu-romanporno.com

 

Writer

매거진 <DAZED & CONFUSED>, <NYLON> 피처 에디터를 거쳐 에어서울 항공 기내지 <YOUR SEOUL>을 만들고 있다. 이상한 만화, 영화, 음악을 좋아하고 가끔 사진을 찍는다. 윗옷을 벗은 여성들을 찍은 음반 겸 사진집 <75A>에 사진가로 참여했다.
박의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