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한다. 음모론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우리가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던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인간은 달나라에 진짜 갔을까, 911테러는 미국 정부의 자작극일까, 심지어 엘비스 프레슬리는 진짜 생존해 있을까 같은 무수한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2016년 4월에 개봉한 영국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이런 음모론을 소재로 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던 홀로코스트가 거짓이거나 과장되었다고 믿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Holocaust Denier)’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부분 처음 알게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징이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고, 수많은 생존자의 육성 증언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를 부인하는 음모론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3분의 2에 이르는 일반인들은 이 음모론을 들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홀로코스트 부인론" 소개 영상. 17개국이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96년부터 4년간 영국 법정에서 열린 세기의 명예훼손 재판 ‘어빙 대 펭귄북스(Irving vs. Penguin Books)’ 사례를 실명으로 다룬 법정 드라마다. BBC Film이 투자한 영화로, <보디가드>(1992)로 이름을 알린 74세의 노장 감독 믹 잭슨(Mick Jackson)이 연출을 맡았다. 배우 진영도 화려하다. <미이라> 시리즈(1999, 2001), <더 랍스터>(2015), <유스>(2015) 등에 출연해 독특한 매력을 뽐낸 레이첼 와이즈(Rachel Weisz), <배트맨 비긴즈>(2005)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등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톰 윌킨슨(Tom Wilkinson), <해리포터> 시리즈로 우리에게 얼굴을 알린 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BBC 드라마 <셜록>의 ‘모리어티’ 앤드류 스캇(Andrew Scott)까지, 영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배우들이 모였다. 한 건의 재판을 소재로 하여 다소 지루할 거라는 편견은 버리자.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이나 <굿와이프> 같은 법정 드라마를 즐겨 보는 관객이나 역사적 사실과 지식에 목마른 관객이라면 2시간이 짧게 느껴질 것이다. 영화 예고편과 함께, 영화를 보며 추가로 궁금해할 사항들을 좀 더 깊게 파헤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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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는 영국 법정의 실제 재판과정과 실명에 기초하고 있다

피고 측 법정 변호사 리차드 램프턴 역을 맡은 배우 톰 윌킨슨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영국인 ‘데이비드 어빙’(티모시 스폴)은 미국인 홀로코스트 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가 자신을 비난한 서적을 영국에서 출판할 때까지 기다려 영국 법원에 명예훼손(libel)으로 제소한다. 영국법은 미국법과는 달리, 원고가 아니라 피고가 입증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피고인 립스타트와 영국의 대형 출판사 펭귄북스는 솔리시터(solicitor, 사무 변호사)로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캇)를, 배리스터(barrister, 법정 변호사)로 ‘리차드 램프턴’(톰 윌킨슨)을 선임한다. 영국법 상 변호인은 법정에서 변론을 맡는 배리스터와 의뢰인을 대변하는 솔리시터로 역할이 구분되며, 영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 홀로코스트 부인론(Holocaust Denial)은 반유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60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허구 또는 과장이며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가 질병이나 기아로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나치의 수뇌부는 인종 말살 명령을 내린 적이 없고, 살해를 명령한 증거물 또한 없다고 주장한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이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으로 과장 또는 조작한 산물이라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대부분 반유대주의(Anti-Semitism), 히틀러와 나치를 추종하는 세력, 반이스라엘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대해 독일, 오스트리아 등 17개국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으나, 다른 국가들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 관점에서 허용하고 있다.

 

3.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대인 인구는 핵심 쟁점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은 오래전부터 박해를 피하여 유럽 전역과 미국에 흩어져 살아 정확한 인구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당시 유럽에 살던 유대인 인구를 약 3~400만 명으로 추산하며, 6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숫자가 크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약 900만에서 1,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절반 이상이 나치 점령 기간 중 살해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4. 재판은 미디어의 큰 관심이었고 여론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데보라 립스타트와 그를 연기한 배우 레이철 와이즈

재판의 원고이자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스스로 변론하였으나, 피고인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와 영국의 대형 출판사인 펭귄북스(Penguin Books)는 유능한 변호사들을 선임하였다. 일부 언론은 이 재판을 다윈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면서 은근히 원고에 동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실제 한 조사에 따르면,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약 3분의 1에 이른다고 한다. 부인론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것으로 의심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5. 세기의 재판 이후 여러 에피소드

데이비드 어빙과 그를 연기한 배우 티모시 스폴

결국 재판에 진 어빙은 상급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피고의 재판 비용까지 합하여 200만 파운드를 물어내게 된 어빙은 개인 파산을 신청한다. 그 후엔 홀로코스트 부인론이 금지된 오스트리아에서 1989년 발표한 연설 내용이 문제가 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체포되기도 했다. 청원 과정에서 자신의 기존 주장을 철회하고 나치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고 인정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돌아와 지금까지 저술과 강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BBC와 인터뷰 중인 데이비드 어빙(2000)

제소에서 판결까지 4년이 걸린 이 재판의 핵심은, 홀로코스트가 진실이냐 아니냐보다 홀로코스트 관련 증거를 원고가 의도적으로 왜곡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어빙의 말처럼 역사는 최종 장(chapter)이 없는, 지속적인 수정 및 보완이 필요한 것이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 왜곡, 선별, 과장되는 것은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깊고 전문적인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 강력히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