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입니다. 계절이 늘 그렇듯 지난 추위가 무색하게 어느덧 따뜻해졌습니다. 그새 꽃도 피고, 봄비도 몇 번 내리고요. 이제 곧 거리는 반팔 차림들로 가득해질 테고, 불면의 더위가 찾아왔다가 선선한 바람에 한숨 놓을 때쯤 다시 눈이 내리겠죠. 계절이 늘 그렇듯이요.

어느 계절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한 때를 지니고 있지만, 봄은 진짜 표정을 밤에 보여줍니다. 낮의 봄은 너무나 찬란해서 굳이 느끼지 않아도 좋을 감정까지 불러오거든요. 하지만 밤이라면 모든 것이 적당합니다. 너무 빛나지도, 어둡지도 않은 적절함. 그리고 그런 봄밤에는 산책이 제격이죠. 봄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우리 같이, 산책할까요?

 

<별밤의 산책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 | 알마 | 2013


집을 나서기 전, 우선 책 한 권 읽고 가요. <별밤의 산책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스티븐 호킹까지 천문학의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밤하늘의 경이로움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우리의 산책길에 별을 보긴 쉽지 않겠지요. 미세먼지가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요즘이니까요. 그러니 더더욱 이 책을 읽고 상상해보는 겁니다. 지구 밖의 수많은 빛과 무구한 시간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관찰했던 산책의 선배들을요.

The Avalanches ‘Because I’m Me’ 


자 이제 집을 나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갑니다. 산책의 필수품, 캔맥주를 사야 하니까요. 비록 이 노래의 가사는 그녀가 왜 날 사랑하지 않는지 알고 싶다는 내용이지만, 우린 감정이입을 노래의 화자가 아닌 ‘그녀’에게 해야 합니다. 맥주를 사서 편의점 문을 나서면, 심장을 꺼내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봄이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으로요. 발걸음 경쾌하게!

Donnie & Joe Emerson ‘Baby’ 


1979년에 발표된 이 노래를 알게 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지나치듯 보게 된 의류회사의 광고 BGM이었거든요. 아무도 없는 한밤의 가게에서 여자는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춥니다. 밤과 자신을 만끽하는 듯한 그녀를 본 이후로 이 노래는 밤의 고요한 댄스곡 넘버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산책하면서 우리도 슬쩍슬쩍 스텝을 밟아봐요. 누가 보면 어쩌냐고요? 뭐 어때요, 봄인걸요. 심지어 밤인데요.

(참, 그 광고는 이것입니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이장욱 | 문학과지성사 | 2016


자, 이제 잠깐 쉬었다 갈까요. 밤바람을 느끼며 책 한 권 읽어야죠. 산책길에 가져가기 좋은 크기와 무게. 바로 좋아하는 시집을 읽는 겁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늘 신비로운 경험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곤 하죠. 마침 이 시집에 적절한 구절이 있네요.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 ‘밤의 독서’ 중

윤석철 트리오 ‘춘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윤석철 트리오의 노래를 들으면 서울의 어느 동네가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없는데도요. 즐거웠고 그만큼 아쉬웠던 기억이 많았던 장소라, 어느 감정선에 치우치지 않은 멜로디와 맞아 떨어진 게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짐작은 집으로 가는 길, 산책의 여운을 느끼며 가기에 이 노래가 얼마나 적당한지에 대한 대답도 되지 않을까요.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 한겨레출판 | 2017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이 책을 읽으며 이번 산책을 마무리할까 해요. 걷기와 쓰기가 인생의 전부였던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집 <산책자>입니다. 발저는 생의 마지막도 크리스마스 아침 산책길에서 맞이했을 정도로 언제나 산책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산책하며 마주했던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 별것 아닌 모든 것들이 그의 이야기가 되었죠. 이 책에 실린 총 42편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의 산책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집을 나서 산책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번 산책, 어떠셨나요? 길지 않은 산책이었지만 부디 즐거우셨길. 그리고 우리의 산책도 어느 시간에 접혀있다 문득 튀어나오는 기억이 되거나 고요한 이야기가 되길 바랄게요.

 

Writer

심리학을 공부했으나 사람 마음 모르고, 영상 디자인을 공부했으나 제작보다 소비량이 월등히 많다. 전공과 취미가 뒤섞여 특기가 된 인생을 살고 있다.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가끔 영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