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의 마지막 거장이자 영원한 젊은 시네아스트 에릭 로메르. 그의 이름이 낯설어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진다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확인해보자. 금세 친근하게 느껴질지도.

키워드 1. 누벨바그

에릭 로메르 감독은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이란 뜻의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New Wave)를 대표하는 이 중 한 명이다.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클로드 샤브롤 등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칼럼니스트 출신이다. 누벨바그는 틀에 박힌 기성 영화들을 자연광이 쏟아지는 거리로 해방시키는 젊은 영화인들의 움직임이었다. 스냅사진처럼 자유롭고 가벼운 분위기와 아마추어리즘, 종잡을 수 없는 편집, 느슨한 이야기와 무명의 젊고 새로운 배우들, 감독의 미학을 중시하는 작가주의 등을 특징으로 한다.

 

키워드 2. 홍상수와 우디 앨런

로메르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의 행동보다 그 행동을 할 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루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름들이 있다. 홍상수 감독은 특히 자주 비견되곤 한다. 지질한 감정이 난무하는 연애와 술자리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진짜 마음들에서 두 거장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인들의 허위와 가식,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 감독과의 유사점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을 보자. 우디 앨런은 저리 가라 할 만큼 끊임없이 수다 떠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키워드 3. <에릭 로메르와 함께>(2010)

<비행사의 아내>(1980), <녹색 광선>, <가을 이야기> 등 오랜 시간 동안 에릭 로메르와 함께 작업했던 배우 마리 리비에르가 연출한 에릭 로메르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작은 카메라를 들고 에릭 로메르와 그의 지인들을 찾아가 그의 영화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 이번 기획전에서도 상영한다고 하니, 카메라 뒤가 아니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을 만날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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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4. <녹색 광선>

1986년 파리, 젊고 아름다운 델핀은 여름 휴가를 혼자 보내야 하는 외로운 처지다. 남자친구와는 소원한 데다, 겨우 따라간 휴가지에서조차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마음이 편치 않다. 에릭 로메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녹색 광선>은 쥘 베른의 로맨틱한 모험 소설 <녹색 광선>(1982)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녹색 광선’은 영화 속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그걸 본 사람은 상대의 진심이 보이는 마법 같은 힘을 얻게 되는 찰나의 순간으로 표현된다. 마침 독립출판사 ‘딴짓의 세상’이 텀블벅 프로젝트를 통해 원작 소설을 번역, 발간하였다. 모티브와 사랑과 삶에 대한 재치 있는 통찰을 선보인다는 점에선 서로 같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니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 언제 읽어도 좋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무엇을 먼저 볼까?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는 그가 시기별로 몰두하던 영화적 주제에 따라 나뉜다. ‘여섯 개의 도덕’ 연작, ‘희극과 격언’ 연작, ‘사계절’ 연작 등인데, 모두 다 소화해낼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래 리스트를 참고하자.

 

<봄 이야기>

Conte de printemps ㅣ 1990 ㅣ 출연 안느 테세드르, 위그 케스테, 플로랑스 다렐

‘사계절 연작’의 첫 번째 작품.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잔느는 주말에 딱히 머물 곳이 없다. 남자친구의 집은 온통 어질러져 있고, 잔느의 집에는 이미 다른 친구가 남자친구와 함께 와 있다. 갑자기 머물 곳을 잃은 잔느는 충동적으로 친구의 파티에 갔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나타샤를 만나 의기투합하고 나타샤의 집에 머문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Ma nuit chez Maud ㅣ 1969 ㅣ 출연 장 루이 트랭티냥, 프랑수아즈 파비앙, 마리-크리스틴 바로

정숙한 결혼 상대자를 찾는 가톨릭 신자 장 루이는 친구 비달을 통해 모드라는 자유분방한 여자를 만난다. 장은 아름답고 지적인 모드의 매력에 이끌려 모호한 감정이 교차하는 하룻밤을 보낸다. ‘여섯 개의 도덕’ 연작 중 네 번째 작품. 1969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해변의 폴린>

Pauline à la plage ㅣ 1983 ㅣ 출연 아만다 랑글레, 아리엘 동발, 파스칼 그레고리

얼마 전 이혼한 마리온과 사촌 동생 폴린이 늦여름 해변을 찾는다. 마리온은 자신이 연애 전문가라고 자부하지만 정작 지금까지 진정한 사랑을 나눈 적은 없다. ‘희극과 격언’ 연작 중 세 번째 작품으로 “입소문 내기 좋아하다 자기가 다친다”는 격언으로 시작한다. 1983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감독상) 수상.

 

<로맨스>

Les amours d'Astrée et de Céladon ㅣ 2007 ㅣ 앤디 기레, 스테파니 크레엥쿠르, 세실 카셀

에릭 로메르의 유작으로 17세기 프랑스의 목가 소설 <아스트레>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목동인 셀라동과 아스트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마을 축제에서 셀라동이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걸 본 아스트레는 셀라동을 차갑게 대하고, 이 때문에 괴로움에 빠진 셀라동은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만다. 2007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메인 이미지 <봄 이야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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