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역, 서대문역, 시청역을 기점으로 한 삼각형 구도의 중심에 위치한 곳. 40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서소문 아파트에 다녀왔다. 세찬 봄비가 내린 다음 날,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미세먼지도 깨끗이 씻겨 내려간 듯했다. 오래된 아파트를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다.

 

철길 옆 내리막길을 따라 걸으면 미동초등학교를 지나 도로 왼편으로 작은 가게들이 보인다. 카레 전문점 더 스푼(The Spoon), 호프집 아지트(AZIT), 미근동 쌀국수, 이탈리안 레스토랑 291-1 café와 비스테이크, 카페 에스프레소룸(Espresso Room) 등.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 보이는 젊은 가게들은 쌀 가게, 얼음집, 여관처럼 낡고 오래된 건물과 공존하고 있다. 허름해 보이는 고깃집 몇 개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서소문아파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영화를 누린 낡은 성, 서소문아파트

서소문 아파트는 주택 시장에서 아파트 비중이 채 2%도 안 되던 1972년에 세워졌다. 서대문구로 흐르던 하천(만조천)을 덮고 물길을 따라 굽은 곡선 형태로 만들었다. 아파트 완공 당시에는 시내 중심가에 있어 접근성도 좋고, 1층에 여러 상가가 있어 좀처럼 보기 힘든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연예인들은 물론 언론계, 정치계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서소문 아파트는 재건축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건물이다. 하천부지 위에는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부수고 새로 짓는 일이 허다한 서울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아파트라니. 이유야 어찌 됐건 놀라움과 대견한 마음이 함께 든다. 2013년, 서울시는 서소문 아파트를 서울 미래 유산으로 지정했다. 영화 <멋진 하루>(2008)에서 전도연과 하정우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아파트 1층 상가에는 녹슨 간판을 내건 분식집, 카페, 미용실, 세탁소 등이 있다. 특이한 점은 상가 사이사이에 동 입구가 있는 것. 특히 7동과 8동 사이에는 건물 후면 골목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이곳을 따라 들어가면 한집 건너 한집마다 식당이 자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상가의 흐름은 통일로에서 시작돼 서소문아파트 뒷골목으로, 또 경의선 철도변으로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다. 이것은 담장을 두르고 주변 지역과의 차단을 꾀하는 요즘의 단지형 아파트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서소문 아파트 특유의 미덕이다.”

- <서울신문>,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2016.06.13일자 시리즈 기사 발췌

 

서소문 아파트는 지상 7층이다. 엘리베이터는 따로 없다. 불길하다는 이유로 4층을 없앴기 때문에 3층 다음이 5층이고, 마지막 층은 8층으로 표시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보면, 계단은 타일이 깨진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벽과 현관문에는 페인트를 새로 칠한 자국이 가득하다. 열린 옥상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탁 트인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남산타워도 잘 보인다. 주변 높다란 건물은 밀집해 있기보다 드문드문 세워져 있어 답답하다는 인상이 없다. 건물 옥상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보며 내려오다 보면 문득 서소문 아파트의 집안 풍경이 어떨지, 과연 이곳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밖은 꾀죄죄하고 낡았지만, 집은 정감 있고 멋스럽게 꾸며져 있을 것만 같다.

   

서소문 아파트 옆으로는 경의선 철길이 나 있다. 이곳으로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 화물차, 경의중앙선 전철이 하루에 수십 번씩 지나간다. 철도와 수직으로 놓인 길에는 차와 사람이 드나드는데, 알림음이 울리면 철도원의 지시에 따라 안전 바가 내려가고 모두 철로 밖으로 멈춰 선다. 얇은 막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속 100km로 달리는 KTX 열차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기차 두 대가 연이어 지나가고,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철길을 건넌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퍽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철길 교차로를 지나면 서소문 근린공원이 있는 삼거리로 길이 이어진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슬슬 허기가 진다. 서소문 아파트 1층에 분식집이 있다. 한가한 오후 시간대라 손님이 없었다. 음식을 만드시는 아주머니께 “여기서 얼마동안 장사하셨어요?” 하고 넌지시 물어보니, 10년이 넘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변에는 20~30년 넘은 가게들이 훨씬 많단다. 가게 손님은 인근 회사원이 대부분인데 요새는 경기가 안 좋아서 점심시간에만 잠깐 바쁘다고 했다. 그는 싱겁게 웃어 보이며 이내 푸짐한 양의 음식을 내왔다. 고추장이 듬뿍 들어간 라볶이, 한입에 넣기 힘들 정도로 두툼한 치즈김밥. 재료를 아끼지 않은, 엄마의 투박한 손길이 느껴지는 맛이다.

우리분식

메뉴 김밥, 라면, 떡볶이, 만두국, 덮밥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242-3
전화 02-363-6234
영업시간 06:00~20:00 

 

그밖에 서소문아파트 인근 맛집

1. 더 스푼(The Spoon)

2010년만 해도 미근동 기찻길 골목은 문을 닫거나 오래된 건물이 빼곡했다. 일본 가정식 카레 전문점 더 스푼은 이곳에 처음 생겨난 젊은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가게다. 빈티지한 컨셉의 인테리어와 저렴한 가격대로 누구나 부담없이 식사할 수 있으며 총 7가지 카레를 판매한다. 가격대는 5,000원부터 7,000원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메뉴를 고르기 어렵다면 원하는 메뉴의 토핑을 추가해 달라고 말하자. 500원을 더 내면 밥 대신 쫄깃한 우동 면을 즐길 수 있다.

메뉴 더스푼 카레, 치즈 카레, 떡갈비 카레, 낫또 카레 등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6길 35
전화 02-363-6446
영업시간 11:00~21:00 (브레이크 타임 3:00~5:00)

 

2. 에스프레소룸(Espresso Room)

철길 골목에 있는 유일한 카페. 빨간 벽돌의 멋스러운 외간이 눈에 띄는 에스프레소룸은 2014년 서교동 카페거리에서 미근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프하게 노출된 벽돌, 건물을 둘러싼 나무판 테이블, 선반에 달린 노란 전구는 모두 사장님의 섬세한 손길을 거쳤다. 이곳은 흑맥주처럼 거품이 그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인기다. 아메리카노는 탄자니아 AA,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원두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케이크나 머핀 같은 디저트는 없지만 커피와 잘 어울리는 와플 스낵, 쿠키 따위가 간단히 준비되어 있다.

메뉴 커피, 티, 주스, 에이드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6길 51
전화 070-8269-1429
영업시간 08:00~18:0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3. 돈까스가 땡길때

서소문아파트 7동과 8동 사이 통로 끝자락에 자리한 가게로 2012년 문을 열었다. 평범한 동네 식당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국물, 스프, 샐러드 없이 질 좋은 돈가스와 밥, 두 가지 반찬만으로 승부를 본다. 얼큰한 라면 국물과 두툼한 돈가스가 잘 어우러지는 돈까스 라면은 해장으로 좋고, 간장소스에 파와 양파가 듬뿍 올라간 파파까스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인기 메뉴다. 3,000원을 추가하면 전 메뉴를 더블 돈가스로 즐길 수 있다.

메뉴 순한맛 돈까스, 매운맛 돈까스, 돈까스탕, 돈까스 라면, 파파까스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82-3
전화 02-363-8253
영업시간 11:00~20:30 (브레이크 타임 14:00~17:00 / 주말 및 공휴일 휴무)

 

그밖의 주변 아파트 풍경

서소문 아파트 도보 5분 거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충정아파트가 있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중림동 약현성당과 오른쪽 언덕길로 성요셉아파트가 보인다. 빌딩숲 골목 골목에는 도심에서도 변하지 않은 정감 어린 풍경이 가득 숨어있다. 동네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다시 서소문 아파트로 향했다. 날이 저물자 아파트와 1층 상가에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와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지친 표정의 회사원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가족들이 산책을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비로소 이곳의 일상을 잠깐이나마 살아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충정아파트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250-5

약현성당
주소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성요셉 아파트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6길 34

 

글/사진 이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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