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수없이 다짐하곤 했다. 내 음악을 하고 싶은 만큼하고, 나이가 들면 아주 멋진 영화음악을 만들겠노라고.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므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함께 최대한 사운드트랙에 관한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기억하는 모든 영화 속의 음악을 소개하고 싶지만, 가장 기억에 남고 영향받은 다섯 곡을 영화와 함께 꼽았다.

 

1. LFO ‘Freak’ in <Enter The Void>(2009)

긴 호흡과 독특한 주제의 스토리로 유명한 가스파 노에 감독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시작 전, 아주 짧게 들을 수 있는 사운드트랙 LFO의 ‘Freak’는 사실 전자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인트로 크레딧에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수많은 명곡을 남긴 LFO의 멤버 Mark Bell이 세상을 떠난 후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고, 인트로에 나왔던 곡이 LFO의 음악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제야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달까.

LFO 'Freak'

 

2. Brian Eno ‘Force Marker’ in <Heat>(1995)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액션 영화를 보기 전 그 긴장감을 먼저 느끼고 싶다면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이 음악을 먼저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실험적인 앰비언트부터 밴드음악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꾸준히 좋은 음악들을 선보이고 있는 Brian Eno는 불과 몇 개월 전 Warp Records를 통해 신곡을 발매하며, 꾸준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 두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 영화의 마지막 한 수는 사운드트랙이라고 말하고 싶다.

Brian Eno 'Force Marker'

 

3. Roger Eno ‘Fleeting Smile’ in <The Jacket>(2005)

내가 찾은 유튜브 링크에서는 Brian Eno라고 표기되어있는데, 사실 이 곡의 주인은 그의 형제인 Roger Eno다. 유튜브를 통해 영화보다 먼저 이 음악을 알게 되었고, 아직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매번 ‘꼭 봐야지!’라고 다짐만 한 채 몇 년이 지나버렸다. 이 글을 쓰며 이번엔 잊지 않고 이 영화를 꼭 보겠노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Roger Eno 'Fleeting Smile'

 

4. Da Grass Roots ‘Body Language’ in <Russian Dolls(사랑은 타이밍)>(2005)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2002)에 나오는 Radiohead의 ‘No Surprises’를 듣고 난 후, 세드릭 클래피쉬 감독의 선곡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은 타이밍>을 찾아보았고, 감독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때 ‘라운지’라는 이름으로 묶이곤 했던 프랑스 특유의 전자음악들과 비교했을 때 어딘지 촌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 곡은 오히려 그런 요소들로 인해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재조명된 경우가 아닌가 싶다. 몇 년에 한 번씩 음악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 속 한 장면은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지 않나.

Da Grass Roots 'Body Language'

5. Groove Armada ‘At the River’ in <About Time(어바웃 타임)>(2013)

Groove Armada의 <Soundboy Rock> 앨범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의 히트송을 모은 베스트앨범 <Greatest Hits>를 음반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음반을 얼마나 좋아했냐 하면 이어폰을 끼기만 하면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듣기를 거의 1년 반 정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관에서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이 음악이 나오던 순간 몹시 반가운 나머지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의 팔을 붙잡아 마구 흔들어댔을 정도였다. 사실 영화 속 중요한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아니었지만, 주인공이 가족들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Groove Armada의 ‘At The River’는 아직도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Groove Armada 'At the River'
‘At the River’가 나오는 영화 속 한 장면

 

Writer

GRAYE는 군산 출신의 프로듀서다. 비트 신의 음악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해, 전시와 무용 등 다방면의 예술 세계를 만나는 것으로 꾸준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013년 [MON] EP로 인상적인 데뷔를 치렀고 [{notinparis}], [Junk Pixel/Empty Space] 등의 음반을 발표했다. 토키몬스타(TOKiMONSTA), 온라(Onra) 등의 내한 파티에서 오프닝을 맡는 동시에 '소음인가요', 'Crossing Waves' 등의 전시에 참여하고 'Fake Diamond' 무용 공연에 뮤직 수퍼바이저로 참여하는 등 현재 한국 비트 뮤직 신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GQ KOREA는 그를 ‘6인의 비트메이커’로 선정했고, [Junk Pixel/Empty Space]는 린 엔터테인먼트가 꼽은 2015년 한국 팝 싱글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