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배우, 특히 신인 여배우라면 으레 ‘제2의 000’라는 꼬리표로 대중들에게 홍보되기 마련이다. 배우 한예리는, 처음부터 ‘한예리’였다. 그것은 그가 ‘흔한 외모’라서도(한국의 ‘흔함’의 기준을 알려달라), 데뷔하자마자 그런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 큰 성공을 거두어서도 아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와 색깔과 눈빛을 감추려고도, 굳이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 한예리만의 태도가 여타 신인 배우들과 그녀를 구분 짓는 어떤 경계선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는 배우들의 무용 선생으로 처음 독립영화에 발을 들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 전공생 김예리(한예리의 본명)가 ‘믿고 보는 배우’ 한예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최근 드라마 <청춘시대>를 통해 처음 한예리의 매력에 빠져버린 시청자들에게도, 그간 <해무>, <동창생>, <코리아>, <남쪽으로 튀어> 같은 상업영화에서 역할의 비중과 관계없이 선보인 강렬한 존재감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도 분명 반가운 목록일 것이다.

 

1. <백년해로외전> 

Be with me l 2009ㅣ감독 강진아ㅣ출연 이종필, 한예리, 최시형

김민숙 감독의 단편영화 <기린과 아프리카>로 독립영화계에 얼굴을 알린 배우 한예리는 곧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다. 특히 강진아 감독의 <백년해로외전>은 미쟝센 단편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소개되며 독립영화팬들에게 ‘한예리’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작품. 이 영화에서 한예리는 자전거를 타고 남자친구 ‘혁근’(이종필)을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차경’ 역으로 나온다. 여자친구의 죽음으로 생의 기력을 잃고 매일 울고 괴로워하는 ‘혁근’의 곁에 환상으로 맴도는 차경은 너무나 밝고 건강한 모습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영화 <백년해로외전> 예고편

 

2. <달세계여행>

A trip to the moon l 2009ㅣ감독 이종필ㅣ출연 한예리, 최시형

<백년해로외전>에서 ‘차경’의 남자친구 ‘혁근’ 역으로 그야말로 현실적인 남친을 연기한 배우 이종필 역시 강진아 감독처럼 한예종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그가 연출한 25분짜리 단편영화 <달세계여행>에서 한예리는 소년(최시형)과 함께 달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과 길거리,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교외를 헤맨다. 시적인 영상과 몽환적 사운드로 에워 싸인 목적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불안한 여정이지만, 한예리는 가야 할 방향을 뚝심 있는 눈빛으로 안내한다. 이종필 감독은 이후 배우 류성룡, 수지 주연의 <도리화가>, 배우 김인권, 류현경 주연의 <전국노래자랑>을 연출했다.

 

3. <환상속의 그대>

Dear Dolphin l 2013ㅣ감독 강진아ㅣ출연 이희준, 이영진, 한예리

배우 한예리는 또 한 번 ‘차경’을 연기할 기회를 얻는다. 단편 <백년해로외전>의 장편 버전인 <환상속의 그대>에 출연한 것. 강진아 감독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 집중했던 <백년해로외전>에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해 <환상속의 그대>를 만들었다. 이종필 감독이 연기했던 ‘혁근’은 배우 이희준이 맡았고, 모델 겸 배우인 이영진이 단편에서는 없던 캐릭터 ‘기옥’을 맡아 죽음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일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한예리는 똑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부담감으로 처음에는 <환상속의 그대>의 ‘차경’ 역을 고사했으나, 강진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공감해 다시 한 번 이 역할을 맡았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환상 속의 그대> 예고편

ㅣ영화보기ㅣIndieplug

 

4. <경복>

Big Good l 2012ㅣ감독 최시형ㅣ출연 최시형, 김동환, 한예리

이제 막 수능을 끝내고 스무 살의 목전에 선 두 소년이 독립을 꿈꾼다. 방구석 청춘의 독립기 <경복>은 <달세계여행>에서 한예리의 연인, 또는 동행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 최시형의 연출작이다. 엄마가 여행 간 틈을 타 ‘형근’(최시형)은 친구 ‘동환’(김동환)과 함께 자기 방으로 쓰던 엄마의 슈퍼 구석방을 다른 사람에게 세 놓고 그 돈으로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한예리는 시나리오를 쓰는 형, 뮤지션을 꿈꿨던 남자를 제치고 결국 그 방에 세를 든 대학생 누나 역을 맡았다. 짧은 분량이지만, 한예리는 <경복>의 연출부로 맹활약(?)해 영화의 완성에 힘을 보탰다며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5. <최악의 하루> 

Worst Woman l 2016ㅣ감독 김종관ㅣ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이희준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레전드 단편’을 만든 김종관 감독은 배우 정유미를 통해 좋아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한 여자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해내며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개봉을 앞둔 그의 신작 <최악의 하루>는 일본인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 잠깐 만난 적 있는 유부남 ‘운철’(이희준), 한창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신인 배우 ‘현오’(권율), 이 세 남자와 얽히고설킨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의 서촌과 남산을 오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 한예리는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는 심증으로 분노하는 여자, 한때 자신의 바람 상대였던 집착남을 떼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여자, 어쩌면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지도 모를 남자와 약간의 설렘을 주고받는 여자 ‘은희’로 분해 마주하는 관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표정과 태도를 뻔뻔하리만치 솔직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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