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종이에 채색, 18세기. 리움 소장 

18세기 조선의 대가 김홍도가 그린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는 8절 도화지 크기의 작은 그림이고, 언뜻 치밀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복잡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다. 맨발로 편안하게 앉아 비파를 타는 선비 주변을 둘러싼 사물들은 제각각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바닥에 놓인 파초 한 장, 화병에 꽂힌 산호와 영지까지 도상적 의도 속에서 그려졌다. 그림 왼쪽 상단의 화제(그림 위에 쓰는 시문)는 ‘종이창과 흙벽으로 만든 집에서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고 시나 읊으며 살리라’라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사물들은 제각각 선비의 학문적 신념, 절개, 풍류, 이상적 정치에의 지향 같은 의미를 담고 주제에 걸맞게 배치되었다.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이런 식의 오래된 그림들이 특정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읽어 내는’ 것이 정석적인 감상의 태도임을 안다. 하지만 그런 의식을 밀어 두면, 양말을 벗은 편안한 차림의 선비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고 취미 생활을 즐긴다는 내용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것을 고상한 말로 바꾸자면 ‘풍류를 즐긴다.’ 정도가 될 테니, 딱히 어긋난 감상도 아니다. 나아가 이 그림을 맥락이나 정보에서 떼어 놓고 좋을 대로 생각해보자면, 마음껏 재치 있는 제목을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잠옷 차림으로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인 자기 방에 앉아 SNS나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관 지을 수도 있다. 수입제 비파는 직구로 구매한 걸까 궁금해할 수도, 혹은 저 달관한 듯한 표정이나 약간 가려운 듯 긴장한 왼발 발가락에서 유머 코드를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사물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일까?

책 <유물즈>(김서울·김은하, nicepress, 2016). 출처 유물즈 트위터

<유물즈>(김서울·김은하, nicepress, 2016)는 역사적, 심미적 가치를 지닌 유물을 바라보는 한 태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을 쓴 김서울은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유물에 대한 관심과 재미는 역사 과목 성적이나 흥미와 관련이 적고 오히려 시각 자극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유물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과는 다른 대목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에 글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유물이 아니라 ‘유물즈’다. 김서울은 자신이 유물을 감상하는 독특한 방식을 ‘유물즈’라는 이름으로 장르화 한다. “유물에 애정을 가지는 방법도 다른 시각 매체에 반하는 과정과 비슷해서 한 번이라도 유튜브 혹은 텀블러를 디깅(Digging, 파고들어 열중한다는 의미)하는 취미가 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유물즈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유물즈’는 ‘유물’이라는 이미지를 읽는 자기만의 방식이고, 또 새로운 시각적 취미의 한 갈래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장르의 기록이자 제안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취미이지만 이런 ‘덕질’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가, 하는 조심스러운 제안 속에서 자신의 사례를 보여준다.

<유물즈>에 소개된 코끼리 모양과 소 모양 제기. 소장 및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시종 유쾌하고 격의 없는 평이 유물 사진에 덧붙여지는 이 책의 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자.*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 시대의 소박한 유물 <코끼리모양제기> 소개다. 첫 줄에서 “조선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소개하는데, 마치 사학자들이 만듦새가 부실한 유물을 두고 ‘고졸미가 느껴진다’, ‘느긋하다’, ‘소박하다’는 식으로 돌려 말할 때와 같은 어법으로 ‘독특한 개성’이라 짐짓 관대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줄에서는 “이 코끼리 모양의 제기는 성균관에서 쓰인 것이라고 쓰여 있어 눈을 의심하게 했다”며 황당해하고, 마지막으로 “완성도 있는 코끼리와 소 모양의 제기는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고 못을 박는다. 국보 95호인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를 받치고 있는 토끼들에 대해서는, “점수를 매기자면 형태 10, 귀여움 999, 그리고 완벽함에 999점을 더 주고 싶다”고 애정 공세를 퍼붓는다. 백제 금동불입상에 대해서는 마치 배기바지를 입은 것 같다거나,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장신구를 늘어놓고는 액세서리 숍에 온 것 같다는 등 ‘돌직구’도 예사다.

코끼리 모양 술동이, 소 모양 술동이(제기). 소장 및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한국 미술사를 다루는 교양 강의에서 교수들은 종종 수강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김서울 식의 농담을 던진다. 청자 투각 향로에 새겨진 토끼들의 귀여움을 부각하거나, 실제 코끼리와는 다르게 생긴 못난이 제기를 보여주며 이게 무슨 동물인지 맞춰보라는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누구든 보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건드리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토끼는 귀엽지만,” 하고 수강을 취소할 수도 있겠으나, 만약 거기서 학생의 '버튼'이 눌린다면 그 학생은 한국 미술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농담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제일 고루한 직업을 가진 것만 같은 한국 미술사 교수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수도 토끼를 보면서 귀엽다고, 귀여움이 999점이라고 날뛰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는 뜻이니까. 귀여운 것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도, 못생긴 것은 뭐 저렇게 생겼냐는 마음을 전문가라고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은 새로운 시각이나 태도를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 무언가 시작할 수 있도록 하지 않던가. 게다가 무언가 좋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진지함과 멀다는 것이야말로 생각할수록 이상한 이야기다.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의 세부 

손에 쏙 잡히는 이 유쾌한 안내서를 그 정체성이 돋보이도록 디자인하고, 책을 닫는 글을 쓴 사람은 나이스프레스의 김은하다. 그는 유물들에 대한 책을 만든다는 것에 “엄했던 국사 선생님 한 명 기억나질 않는데도 매체를 통해 각인된 이미지들 때문인지 고결하고 고귀한 것들에 죄를 짓는 기분”이 처음에는 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김서울과 책을 만드는 동안 편안해진 그의 기분은, 분명 좋은 것을 같이 보고 싶어 하는 마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마냥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 곳곳에 묻어 있는 유물과 박물관을 향한 애정 어린 코멘트는 작가의 만만치 않은 ‘덕력’을 짐작게 한다. 마침 따뜻해진 봄에 <유물즈>를 읽고 나면, 어느샌가 박물관의 예쁘고 못생긴 그릇이나 불상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깔깔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유물즈>의 본문은 유어마인드의 <유물즈> 제품 소개에 공개된 항목으로 되도록 한정하였다. 소규모 출판물인 만큼 더 많은 내용은 본문에서 직접 확인하길 권한다.

 

유물즈 트위터
나이스프레스
유어마인드 <유물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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