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맥도나는 21세기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극작가 출신 영화감독으로, 그의 작품은 매번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페르소나는 바로 배우 콜린 패럴이다. 마틴 맥도나의 최근작 <이니셰린의 밴시>(2022)가 공개된 이후 가장 주목받은 건 콜린 패럴의 연기다.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그의 입체적인 연기에 평단과 관객이 찬사를 보냈다.

마틴 맥도나 뿐만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 올리버 스톤, 마이클 만, 테렌스 맬릭, 팀 버튼, 요르고스 란티모스 등 명감독들이 콜린 패럴과 호흡을 맞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개성 강한 아트필름까지, 그는 예산과 상관없이 다양한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여러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콜린 패럴은 앞에서 소개한 마틴 맥도나와 함께 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에서 온 한 남자가 이젠 할리우드 스타를 넘어 영화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좋은 배우가 어떻게 영화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지 확인할 수 있는, 콜린 패럴의 대표작들을 살펴보자.

 

<폰 부스>

‘스투’(콜린 패럴)는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잘나가는 홍보 담당자다. 스투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고, 울리는 공중전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는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는 스투를 지켜보고 있다면서, 전화를 끊으면 죽이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스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말들이 이어지고, 스투는 불안해하며 그의 말을 따른다. 스투는 어느새 살인범으로 몰리고, 경찰들이 몰려오는 가운데서도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갈 수 없다.

콜린 패럴이 주목받기 시작한 데에는 조엘 슈마허의 공이 크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배트맨 앤 로빈>(1997)을 배트맨 시리즈 최악의 작품으로 기억하는 이도 있겠지만, 콜린 패럴에게 조엘 슈마허는 은인이나 다름없다. 조엘 슈마허는 스타일리시한 화면으로 주목받아 온 감독이고, <타이거랜드>(2000)에 신인이었던 콜린 패럴을 주연으로 캐스팅한다. 이후 둘은 <폰 부스>(2002)로 재회한다. <폰 부스>는 1시간 30분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지금도 <폰부스>는 제한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영화의 레퍼런스로 자주 언급된다. 플래시백 사용도 없이, 콜린 패럴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원맨쇼에 가까운 영화다.

나의 은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들어간 폰부스가 어느새 나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하는 장소가 된다. 누군가는 콜린 패럴이 처한 상황의 개연성에 대해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연기는 그 자체로 개연성이 되어준다. 콜린 패럴이 보여주는 다양한 감정 연기가 몰입해야 할 이유이자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더해준다. 한 배우가 혼자서 극을 어디까지 이끌어갈 수 있을까? <폰부스>의 콜린 패럴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되어준다.

 

<뉴 월드>

‘존 스미스’(콜린 패럴)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떠나는 영국 탐험대의 일원이다. 탐험대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원주민들을 만난다. 탐험대와 원주민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존 스미스는 원주민들에 대해 알아 와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존 스미스는 원주민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족장의 딸인 ‘포카혼타스’(코리안카 킬처)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탐험대와 원주민의 관계는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테렌스 맬릭은 영화계의 은둔시인으로 불린다. 시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 참석해서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작품 발표 주기만 봐도, <천국의 나날들>(1978)과 <씬 레드 인>(1998)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이 있다. 그와 작업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명배우들이 그의 영화에 출연했다가 편집 당해서 출연 분량이 대폭 줄기도 한다. 테렌스 맬릭이 포카혼타스 이야기를 영화화하면서 주연 역할을 맡긴 건 콜린 패럴이다.

콜린 패럴이 연기한 스미스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최초의 영국 식민지를 건설한 인물이지만, <뉴 월드>(2005)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정에 집중한다. <뉴 월드>는 궁극적으로 사랑에 대한 영화다. 스미스와 포카혼타스는 서로를 발견하고, 새로운 대지를 발견할 때처럼 서로에게 특별한 감흥을 느낀다. 사랑은 매번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낯선 세계에 발 디딜 때 우리는 기대와 걱정을 함께 품는다.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에게 품은 마음은 어디까지 진심이었을까. 많지 않은 대사와 내레이션을 통한 전개, 아름다운 화면과 함께 정적으로 전개되는 스타일까지, 콜린 패럴에게는 지금까지도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독특한 영화 중 하나다. 콜린 패럴의 연기 인생에서도 <뉴 월드>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계기가 아니었을까.

 

<더 랍스터>

짝을 얻지 못하는 이들은 동물로 변하는 세계에서, ‘데이빗’(콜린 패럴)은 마지막 기회를 찾아 커플이 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호텔에 들어간다. 사랑을 찾아야 하는 세계이지만 데이빗은 어려움을 겪고 근처 숲으로 탈출한다. 숲을 지키는 ‘리더’(레아 세이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규칙을 강조한다. 데이빗은 숲에서 만난 ‘근시를 가진 여자’(레이첼 바이스)에게 점점 마음이 가는 걸 느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보여주는 그리스 출신 감독이다. 독특한 현대 신화를 만드는 가운데, 그가 주연으로 두 번이나 호흡을 맞춘 배우가 바로 콜린 패럴이다. <더 랍스터>(2015)에서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될 위기와 남자, <킬링 디어>(2017)에서 의문의 소년이 가진 초현실적인 능력 앞에 무기력한 의사까지, 혼란의 중심에 선 캐릭터를 연기한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콜린 패럴의 얼굴을 통해 왜 그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신화보다도 많은 은유를 담고 있다.

콜린 패럴이 연기한 데이빗은 두 가지 세계에 속하게 된다. 짝짓기에 실패하면 동물로 변하는 세계와 그러한 세계에 저항하여 사랑에 거부하는 숲속 세계. 두 세계 사이에서 데이빗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하려 발버둥을 친다. 인간은 동물에 비해 적응력이 훨씬 떨어져 보이는데, 이는 감정 때문이다. 감정이 생존을 위협하기도 하고,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에 실패하면 어떤 동물이 되고 싶은지, 사랑에 성공한다면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더 랍스터>를 보고 하게 되는 질문조차 결국 사랑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다. 사랑이 생존 혹은 위협이 되는 시대에 살아본 적 없어도, 콜린 패럴의 표정과 몸짓은 관객을 그 세계로 진입하게 만든다.

 

<애프터 양>

‘제이크’(콜린 패럴)는 집에서 함께 지내는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민)이 고장 났다는 걸 알게 된다. 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수리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 그러던 중 제이크는 양의 메모리 뱅크를 발견한다.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하나씩 살펴본다.

코고나다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드라마 <파친코>의 공동 연출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전작인 <콜럼버스>(2018)에 이어 <애프터 양>(2022) 또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다. 대사가 많은 역할을 주로 해 온 콜린 패럴이지만, <애프터 양>은 오히려 여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SF영화이지만 서정적인 드라마에 가깝다. 콜린 패럴은 차(茶)에 애정을 가지고, 안드로이드와의 추억을 돌아보는 이로 등장한다. 인종별로 모두 모인 가족 형태와 SF라는 장르까지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 콜린 패럴의 연기다.

<애프터 양>은 기억에 관한 영화다. 양의 메모리 뱅크를 열어보고, 그 안에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이 있다. 인간을 늘 지켜 보는 구름이나 해처럼, 양은 늘 주변 사람들을 살펴본다. 양은 중국에서 입양한 딸이 중국의 전통을 습득하는 역할을 위해 함께 살게 된 안드로이드다. 양은 제이크의 딸에게 중국 전통에 대해 알려주지만, 더 크게 보자면 제이크의 가족들에게 기억의 가치를 알려준다. 어떤 기억은 전통보다도 단단하게 이어진다. 인간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합이나 다름없다. 추억이 되는 대화나 사진들이 자동화되어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시대에, 기억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니셰린의 밴시>

‘파우릭’(콜린 패럴)에게 ‘콜름’(브렌던 글리슨)과 함께 술집을 가는 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그러나 콜름은 갑작스럽게 파우릭에게 절교는 선언한다. 파우릭은 납득할 수 없어 콜름을 찾아가지만, 콜름의 태도는 변화가 없다. 심지어 콜름은 자기를 계속 찾아오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말한다. 파우릭은 콜름의 말에 걱정하면서도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마틴 맥도나는 영국 연극판을 휩쓸고 온 극작가 출신 감독으로, 그의 이야기가 가진 힘은 할리우드에도 유효했다. <이니셰린의 밴시>(2022)는 이전에 <킬러들의 도시>(2009)에 출연했던 콜린 패럴, 브렌던 글리슨이 마틴 맥도나와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두 주연배우와 배리 키오건과 케리 콘던까지도 모두 아일랜드 출신 배우로,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가상의 섬 이니셰린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콜린 패럴은 <이니셰린의 밴시>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 역사에 대한 은유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그 이전에 관계에 대한 영화다. 파우릭과 콜름은 작은 섬에서 함께 공존하지만, 완전 반대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듯 보인다. 마치 하나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찬반을 나누어 대립하는 세력처럼.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 아일랜드라는 배경이 가진 특수성이 관계에 대한 보편의 질문으로 환원되는 건 콜린 패럴의 표정 덕분이다.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신인 배우였던 콜린 패럴은 어느새 <더 배트맨>(2022)의 펭귄부터 <이니셰린의 밴시>의 연극적인 연기까지 캐릭터 수집가라고 해도 될 만큼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가 되었다. 콜린 패럴의 연기 세계는 더 넓고 깊어질 예정이다. 아이리시 인베이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