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제이더(Cal Tjader)는 라틴 재즈에 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다. 데이브 브루벡의 초창기 밴드에서는 드럼을 쳤고, 조지 시어링의 밴드에서는 비브라폰을 연주하며 당시 미국 서부 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라틴 멜로디에 빠졌다. 1950년대 말 맘보(Mambo) 댄스가 유행하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맘보 밴드를 결성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수시로 다양한 형태의 라틴 재즈 밴드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재즈 클럽 블랙호크(Black Hawk)에 고정 출연했고, 그가 발매한 앨범들이 대부분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며 라틴 재즈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올라섰다. 왕성한 활동을 계속 하던 그는 1982년 필리핀 공연을 위해 현지에 갔다가, 공연 전날 심장마비로 56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제이더가 앨범 100여 장에 남긴 음악은 후일 힙합 연주자들이 자주 샘플링하여, 재즈 퓨전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칼 제이더의 버브(Verve) 시절 전성기를 대표하는 앨범 <Soul Sauce>(1964)의 ‘Soul Sauce’

칼 제이더의 이름이 다소 생소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스웨덴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탭 댄스를 하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며 순회공연을 하는 극단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음악과 댄스에 익숙해졌다. 아버지로부터 드럼과 각종 타악기를,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워 여러 악기를 잘 다루었다. 어린 시절 ‘Tjader Junior’란 예명으로 무대에서 탭 댄스를 추었고, 16세의 나이에는 진 크루파 드럼 대회에서 우승한 음악 신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태평양전쟁의 치열한 전투에 참여한 전쟁 영웅이었고, 제대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 다니면서 데이브 브루벡과 폴 데스몬드를 만나 재즈 밴드를 결성하였다. 세 사람의 밴드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데이브 브루벡이 다이빙을 하다가 중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면서 밴드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조지 시어링의 밴드에 고용되어 드럼 외에도 비브라폰과 봉고를 연주하였고, 몽고 산타마리아와 같은 라틴 뮤지션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1968~69년 녹음한 컴필레이션 앨범 <Fried Bananas>(2005)

칼 제이더는 데이브 브루벡 시절부터 연을 맺었던 판타지 레코드와 일하다가, 1960년대 들어서는 버브(Verve)와 계약하면서 음악적 전성기를 맞았다. MGM로 인수되어 탄탄한 자금력을 갖춘 ‘버브’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음악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에서 벗어나 라틴 음악, 아시아 음악으로 저변을 넓히며 재즈 퓨전 음악으로 다가섰다. 그가 발매한 라틴 음악풍의 음반들은 꾸준히 팔리며, 상업적으로 성공한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1980년도에는 콩코드(Concord)로 영입되었는데 콩코드는 그의 라틴 음악을 위한 맞춤형 레이블 ‘콩코드 피칸티’(Concord Picante)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제이더의 생애 마지막 레이블이 된 콩코드 피칸티에서 모두 다섯 장의 음반을 냈는데, 그 중 <La Onda Va Bien>(1979)은 그에게 그래미 라틴재즈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겼다.

앨범 <Latin Kick>(1956)의 ‘Invitation’

칼 제이더는 뛰어난 즉흥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라틴 음악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고, 뛰어난 편곡 재능으로 라틴 음악을 재즈에 접목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이끌었다. 그는 몽고 산타마리아, 윌리 보보(Willie Bobo), 에알토 모레이라, 폰초 산체즈, 카를로스 산타나 등 뛰어난 라틴 뮤지션들과 함께 활동하며 라틴 재즈의 중흥을 이끌었다. 그가 생을 마감한 지 4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제이더가 낸 앨범 <Latin Kick>(1956), <Soul Sauce>(1964), <Solar Heat>(1968), <La Onda Va Bien>(1979)은 라틴 재즈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