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던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는 1897년 다음 세기 최고의 공포 아이콘이 될 캐릭터를 세상에 선사했다. 소설 제목과 동명인 캐릭터 이름은 ‘드라큘라’(Dracula). 루마니아 중서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에 관해 조사하고,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창조한 흡혈귀였다. 소설 <드라큘라>는 극단에서 연극 형식으로 상연되다가, 1930년대부터는 영화로 제작되어 흑백 스크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를 연기한 배우는 크리스토퍼 리, 게리 올드만 등 명배우를 포함해 무수히 많지만, 연극으로 드라큘라를 연기하다가 가장 먼저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긴 벨라 루고시(Bela Lugosi)에 견줄 배우가 아직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까지 드라큘라 캐릭터의 액션 피규어는 대부분 그를 모델로 하고 있을 정도로, 가공의 캐릭터를 현실로 불러들인 상징적인 배우로 계속 기억되고 있다.

현재 시판 중인 드라큘라(벨라 루고시) 액션 피규어들

 

드라큘라의 원조

벨라 루고시는 루마니아와 국경을 맞댄 헝가리에서 자라나 극단에서 활동했고, 독일로 이주해 무성 영화에 출연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에서 ‘드라큘라’ 백작 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1931년 유니버설 영화사가 연극 무대에서 인기있던 <드라큘라>를 처음 영화로 제작하려 했을 때, 영화 <노틀담의 꼽추>(1923), <오페라의 유령>(1925)로 최고의 호러 배우였던 론 체니(Lon Chaeney)가 먼저 고려되었다. 하지만 체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다른 배우들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경쟁했고,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물며 영화 배우로 변신하려 했던 루고시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그의 매서운 눈빛과 투박하고 익숙하지 않았던 영어 발음, 그리고 연극 무대에서 몸에 배인 과장된 동작은 드라큘라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당시로선 거액인 34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 <드라큘라>(1931)는 시사회에서 일부 관객이 무서운 장면을 보고 기절하였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관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단의 찬사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고, 벨라 루고시는 론 체니의 뒤를 잇는 새로운 호러 스타로 부상했다.

영화 <드라큘라>(1931) 예고편

 

타이프캐스팅의 희생자

그는 드라큘라 영화의 아이콘으로 드라큘라 후속편의 주연을 계속 맡았고, 고딕 호러(Gothic Horror) 장르의 최고 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같은 해에 흥행을 이끈 호러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의 주연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와 함께 호러 영화의 쌍두마차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호러나 미스터리 영화에서 기이한 배역으로 계속 출연하게 되어 악역 이미지가 굳어진 대표적 타이프캐스팅(Typecasting) 희생자로 꼽히기도 한다. 루고시는 코미디를 하고 싶었지만 194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이 낮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캐릭터의 제안만 계속해서 들어왔고,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배우가 되었다. 뒤늦게 신진 감독 에드 우드(Ed Wood)가 그를 캐스팅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1956년 7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과거 영화에서 입었던 드라큘라 복장으로 입관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말년은 팀 버튼 감독의 흑백 영화 <에드 우드>(1994)에서 볼 수 있는데, 영화에서 벨라 루고시를 연기한 마틴 란다우(Martin Landau)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국 밴드 바우하우스(Bauhaus)의 ‘Bela Lugosi’s Dead’(1979)는 고딕 록(Gothic Rock)의 대표곡이다.

 

신작 드라큘라 영화 <렌필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원작에서 ‘렌필드’(Renfield)는 드라큘라 백작의 조종을 받고 그를 추종하는 부하로 등장한다. 렌필드는 백작이 보낸 곤충이나 동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 믿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버티지만, 결국 드라큘라 백작을 배반해 그에게 목이 부러져 살해된다. 벨라 루고시의 원조 <드라큘라>(1931)에서는 드와이트 프라이어(Dwight Frye), 그 후에는 클라우스 킨스키(1970), 톰 웨이츠(1979) 등 악역 전문배우들이 전담한 배역이었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는 동물의 피를 마시는 강박증 환자를 가리켜 VPD(Vampire Personality Disorder)라 불렀는데 이들을 렌필드 증후군(Renfield Syndrome)로 부르기도 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렌필드를 노래하는 앨리스 쿠퍼 ‘Ballad of Dwight Frye’(1971)

이제 드라큘라 백작이 조연으로 물러나고, 렌필드가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 비중을 바꾼 영화 <렌필드>(Renfield)가 4월에 개봉한다. 렌필드 역은 니콜라스 홀트, 드라큘라 역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다. 원래 드라큘라 캐릭터의 열렬한 팬이었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강렬한 드라큘라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하여 프랭크 란젤라(Frank Langella)의 <드라큘라>(1978), 게리 올드만의 <드라큘라>(1992)에서 전임자의 연기를 면밀하게 관찰, 연구했다고 한다.

영화 <렌필드>(2023)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