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재즈 클럽이나 재즈 카페의 벽면 포스터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명한 사진이 하나 있다. 바로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이 무대 위에서 담배를 피며 자신이 뿜어낸 자욱한 연기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사진은 1948년 뉴욕의 재즈 클럽 로열 루스트(Royal Roost)의 리허설 무대에서 찍혔는데,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긴 재즈 포토그래퍼가 바로 허먼 레너드(Herman Leonard)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23년 3월에 출생하여 20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악기 하나도 없이 오로지 사진으로 재즈를 정의했다’라는 빛나는 수식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진에는 마치 바이닐에 수록한 실황 음반처럼, 담배 연기로 자욱한 무대 위에서 재즈 뮤지션의 열정적인 표정과 그의 이마에 묻은 미세한 땀방울을 볼 수 있으며 마치 재즈 음악이 흘러 나을 것만 같은 현장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Smithsonian Magazine <Herman Leonard’s Jazz Photographs>

 

무명의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어릴 때부터 사진을 배운 그는 오하이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버마로 파병되어 군 생활을 마쳤다. 대학 졸업 후에는 캐나다 오타와로 건너가 명사들의 인물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Yousuf Karsh)로부터 배웠고, 1948년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자신의 사진관을 열어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재즈 팬이었던 그는 밤마다 로열 루스트, 버드랜드와 같은 재즈 클럽을 돌아다니며 스틸 사진을 찍었다. 클럽의 양해를 구해 클럽의 전단지에 들어갈 스틸 사진을 찍어서 입장료 대신 제공하였고, 자신이 찍었던 사진이 다운비트(Down Beat) 같은 잡지에 채택되면 10달러를 받았다.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다른 이들보다 적은 수의 조명을 사용하여,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어둡고 흐릿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동안 재즈 프로듀서 노먼 그랜츠에게 고용되어 음반에 수록할 인물 사진을 찍었고, 스타배우 말론 브란도에게 고용되어 함께 아시아에 여행하면서 그의 기록 사진을 찍기도 했다.

허먼 레너드의 사진을 표지로 쓴 앨범 <Study in Brown>(1955)과 <More West Coast Jazz>(1958)

 

세계를 유랑한 자유로운 영혼

그는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재즈 전성기가 지나자 프랑스 파리에 오래 머물며 패션 사진이나 뮤지션들의 사진을 찍었고, 1980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스페인의 휴양지 이비자(Ibiza) 섬에서 8년을 보냈으며, 이후에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때 노팅힐에서 생애 처음으로 사진전을 열었는데, 1만여 명의 관람객에 더해 샤데이, U2의 보노 같은 음악계 거물들이 전시회에 참석하여 그의 사진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순회 전시를 하다가 뉴올리언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그 곳에 정착하여 재즈와 블루스 클럽의 현장 사진을 찍었다. 2005년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그의 집을 덮쳐 8,000여 장의 소중한 사진들이 수장되었지만, 다행히 고지대의 뮤지엄 창고에 원본이 보관되어 간신히 사진을 보존할 수 있었다. 노년에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생애 마지막까지 음반사, 영화사나 매거진과 함께 프리랜서 일을 이어갔고, 그가 사망하던 해에는 87세의 노령에 레니 크라비츠와 함께 바하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빌리 홀리데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노년의 허먼 레너드

 

카메라를 든 재즈 레전드

그가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재즈의 전성기에 찍었던 수많은 기록 사진들은 재즈 역사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정작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무명의 포토그래퍼였던 그가, 1980년대 런던에서 서랍에 묵혀 두었던 오래된 필름 원본으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는데, 의외로 성황을 이루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래미 재단은 그의 사진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여 보관하였고,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그가 남긴 컬렉션을 영구히 보관하기로 하였다. 어떤 평론가는 허먼 레너드를 가리켜 “악기가 아니라 카메라를 든 재즈 레전드”라 부를 정도로, 재즈 역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었다. 사진집으로는 <The Eye of Jazz: The Jazz Photographs of Herman Leonard>(1990)와 <The Jazz Image: Seeing Music through Herman Leonard’s Photography>(2014)가 대표적이며, 개인 홈페이지에도 그가 사진에 남긴 재즈 역사를 볼 수 있다.

덱스터 고든 사진 외에도 찰리 파커(Birdland, 1949), 듀크 엘링턴(Paris, 1960), 빌리 홀리데이(1949)가 유명하다.

 

허먼 레너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