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보내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에 관해 뜻밖에 사실을 알게 될 수 있다. 잔잔한 하루를 좋아하는지, 자신을 향한 사려 깊은 취향 저격에 기뻐하는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지 등 중요한 정보를 엿볼 수 있다. 

인디음악 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일에 축제를 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을 거다. 바로 2월 11일. 홍대에선 유명한 크라잉넛 한경록의 생일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한경록이 2007년 호프집에서 친한 음악가 선후배들과 함께하던 생일파티가 어느덧 페스티벌로 자리가 커져 홍대의 명절로 불리게 됐다. 공연 비수기인 2월에 열리는 경록절은 음악팬들에게도 단비 같은 축제다. 후원의 형태도 열려 있지만, 일단 무료로 다른 데서 보기 힘든 뮤지션들의 무대를 만나볼 수 있는 데다 무려 맥주도 공짜다.

한경록은 코로나 탓에 공연이 모두 멈췄던 해에도 18시간 비대면 온라인 공연을 이어가며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올해는 문화 예술의 부흥을 꿈꾸며 미술, 과학, 음악 등 전방위적 예술 융합을 시도한 ‘경록절 르네상스’를 무신사 개러지(구 왓챠홀)와 홍대, 마포 일대에서 성대하게 열었다. 라인업 발표는 무려 8차에 걸쳐 이뤄졌다. 이쯤 되니 한경록과 캡틴락컴퍼니 팀이 경록절을 위해 들이는 노고가 얼마만큼일지 가늠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경록절을 준비했을지가 궁금해졌다. 서면으로 만나본 그의 이야기에선 한국에 메디치 가문이 있다면 바로 캡틴락컴퍼니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2023년을 누구보다 의미 있게 시작한 한경록의 인터뷰를 들여다보자.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경록절이 3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렸어요. 이번에는 특별히 ‘마포르네상스’라는 부제가 붙었고요. 비대면 기간에 책과 영상을 통해 르네상스 문화에,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들었어요. 어떤 책이나 영상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이를 통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궁금해요.

경록 코로나 거리두기 기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오랜만에 책도 좀 보고 영상도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메디치 가문 이야기와 르네상스 이야기가 재미있더라고요. 그림으로 된 서양미술사도 읽고, 단테의 <신곡>도 읽고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기를 읽었어요. 시작부터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라고 자신에게 숙제를 내주는 것부터 엉뚱하고 기발했습니다. 예술과 과학을 연결하고 예술과 예술을 융합하는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다빈치가 축제도 기획했더라고요. 그래서 ‘2023 경록절’이 단순히 즐기는 페스티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빈치의 발상처럼 장르와 세대를 초월하고 융합하는 페스티벌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 주변에 아티스트 동료가 많고, 역사적으로는 흑사병 유행이 끝난 뒤 문화 예술이 부흥했고. 마치 코로나 거리두기가 끝나가는 홍대 마포의 상황이 피렌체와 흡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행사를 ‘2023 경록절 마포르네상스’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습니다.

 

Q 평소에 읽는 책이나 즐겨보는 영상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져요. 요즘 즐겨 보거나 듣는 것이 있다면 나눠 주셔도 좋습니다.

경록 책을 다독하는 편은 아니지만,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그리고 고전을 좋아합니다. 최근에 읽은 고전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고, 자기계발서는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읽고 있습니다. 에세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고두고 읽고 있습니다. 김창완 형님의 수필집 <안녕, 나의 모든 하루>도 즐겨 읽습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세상을 보는 지혜>와 <니체의 말>에서 많은 인생의 힌트를 얻었고, 산책할 때 오디오북으로도 즐겨 듣습니다. 김영민 교수님의 칼럼도 꼭 챙겨서 읽습니다. 며칠 전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봤는데 여운이 상당하더라고요. 인터뷰가 너무 수다스러워지네요.

 

Q 생일에 한 턱 내던 자리가 경록절이 되었고, 이젠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것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행사로 성장했는데요. 사람이 좋아서 시작했던 그 마음이 지금도 여전히 동력으로 작용하나요? 아니면 새로운 동력이 추가되거나 생기기도 했을까요?

경록 워낙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경록절이 자연스레 페스티벌로 진화했습니다. 결국 예술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상처받는 일도, 위로받는 일도 다 사람 때문이니 결국 경록절의 기본 동력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채플린의 영화처럼 따뜻한 미소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28년 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동력으로 추가되었죠. 뭐라도 조금은 문화계에 즐거운 도움이 되고 싶었죠. 그리고 다빈치처럼 엉뚱한 기획 자체가 모험이라고 생각했어요. 과연 이 상상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지... 저에 대한 도전이었죠. 경록절의 동력은 사람, 감사,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마포르네상스’는 음악 공연 외에도 북콘서트나 미술품 전시가 같이 열렸어요. 김상욱 물리학 교수나 이병철 시인이 경록절 라인업에 있는 게 색다르게 느껴졌는데요. 음악 바깥의 영역의 분들도 원래 개인적인 교류가 있던 분 중에서 섭외하게 된 건가요? 섭외 배경이 궁금합니다.

경록 음악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양한 예술 분야를 경록절을 통해 엮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뮤지션도 꽤 많고, 시와 음악도 연결되어 있고, 아름다운 조형물도 무대 위에 피어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아는 아티스트들은 직접 부탁을 했고, 김상욱 교수님은 일면식도 없는데, 르네상스에 과학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지인을 통해 소개를 받아 부탁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일정까지 조율해 흔쾌히 참여해 주시고 끝까지 다른 공연들을 즐기다 가셨습니다.

 

Q 경록절을 준비하는 과정을 창작 작업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들었어요. 특정한 뮤지션을 섭외하고, 어떤 그림과 강연을 선보일지 생각하는 작업이 큐레이션 작업과 비슷할 것 같아요. 이번 ‘마포르네상스’를 준비할 때는 큐레이션에 어떤 주제가 있었을까요? 중점을 둔 부분이라던가요.

경록 예술과 예술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다양한 색깔의 에너지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어떤 특수 안경을 쓰고 보면 그림과 그림 사이, 혹은 그림과 음악 사이에 어떤 색의 자장이 보일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술과 아티스트를 물감 삼아 시간과 공간에 조화롭고 아름답게 배치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많은 분께서 도움을 주시고 함께 만들어 갔죠. 셀로판지가 겹쳐지듯 신비로운 빛깔과 향기가 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빛깔 위를 지나가면 잠시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흔쾌히 섭외에 응해준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이 클 것 같아요. 그간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뮤지션들도 경록절에서는 볼 수 있기도 하고요. 모든 분이 그렇지만, 특별히 ‘아 이분 섭외하길 정말 잘했다’ 싶은 뿌듯함이나 만족감을 느낀 뮤지션의 무대가 있었다면요?

경록 정말 다들 감사하죠.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경록절 개막식에서의 김수철 선배님의 무대인데요. 다양한 세대의 관객분들께 감동을 주고 많이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꾸벅)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이번에도 라인업이 8차까지 발표됐어요. 웬만한 페스티벌에 버금가는 라인업 발표예요. 경록절의 규모와 영역이 커지면서 새로 도전한 업무나 시스템상으로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티스트 섭외나 운영에 이전과는 달라진 점이 있었나요?

경록 일단 캡틴락컴퍼니의 수석팀장 겸 직원이 1명 있는데, 직원의 복지를 위해서 경록절을 주5일 근무제로 진행한다고 했더니, 체념하듯 (다죽자 마인드로) 쿨하게 받아들이더군요. 경록절이 끝나자마자 누구를 때려주고 싶었는지 바로 복싱을 등록하더군요.

시스템상 변화는 조그만 사무공간을 만들었고 둘이서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했습니다. ‘나는 나의 노예야!’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과연 경록절이 끝나고 찬란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도하며 일했죠.

갤러리 전시는 현업에 종사하시는 분들께서 팀을 꾸려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원을 받은 아티스트 이외에는 제가 직접 한 분 한 분 연락을 드렸고, 굿즈 포장과 배송 각종 짐 나르기와 마케팅은 수석팀장과 둘이서 진행했고, 경록절 현장에서는 캡틴락의 동료들이 함께해 주었습니다.

생일 당일 로큰롤 시티투어 때, 직접 맥주를 나르고 인사하러 클럽 네 군데를 돌았더니 제 생일이 끝났더군요. ‘과연 누구를 위한 경록절인가?’라고 피식 웃으면서 생일 당일을 고단하게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Q 몇 달 사이에 정말 많은 분과 연락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경록절 이후에, 이런 교류가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하나요?

경록 그럼요. 아티스트들끼리 자연스레 친해져서 협업도 하게 되고, 경록절 때 눈이 맞아 연인이 되는 사이도 있고, 경록절 때 헤어진 전 연인을 피해다니느라 ‘007작전’처럼 즐기는 친구들도 봤는데 아주 스펙터클 합니다. 많은 분께서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해 주기도 합니다.

 

Q 김창완님을 비롯해 함께 작품을 전시하신 조문기님, 그리고 크라잉넛 멤버인 이화백님 등 모두 음악과 접점이 있는 작가 분들인데요. 공연과 함께 전시를 볼 수 있는 경록절 특별전에 참가해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주변 음악인 혹은 음악을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를 꾸리신 소감이 어땠을까요? 전시를 마치고 아티스트분들이 남기신 소회가 있다면요?

경록 저도 경록절 갤러리 전시 ‘로큰롤 르네상스’가 기억에 남는데요. 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작품과 작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와의 대화도 좋았고 관객분들도 좋은 전시까지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림도 판매가 되어서 보람도 느꼈고, 며칠 동안 훌륭한 그림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작년에 비욘세가 6년 만에 발표한 앨범의 제목도 ‘르네상스’라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음악가들에겐 코로나 때문에 갇혀 있던 시간이 ‘무대가 다시 살아나고 문화가 꽃피는 모습을 꿈꾸고 갈망하는 시간’이었겠구나 더 와 닿았고요. 혹시 경록님도 경록절 외에 음악적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거나 그런 점이 있을까요?

경록 와우, 비욘세와 같은 생각을 했다니, 제 감각도 아직 녹슬지 않았나 봐요. 욘세누나 화이팅! 경록절이 끝나고 크라잉넛 합주를 하는데 아주 반갑고 좋더라고요. 이제 제자리로 돌아와야죠. 크라잉넛은 제 에너지의 근원이니까요.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있어요. 어떤 음악이 나올까 저도 궁금합니다.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Q 새로운 시도를 도전한 경록절을 잘 마무리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번 경록절에 만족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경록 정말 만족하는 점은 경록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는 것입니다. 경록절을 준비하면서 예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면서, 시야가 더 넓어지더라고요. 많은 아티스트 여러분, 작은 규모라도 꼭 한 번 기획을 해보길 권합니다. 많은 도움이 돼요. 이 세상은 절대로 혼자 굴러갈 수 없는 구조입니다. 경록절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더 겸허해야 함을 배웠고,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다음 경록절엔 ‘마포르네상스’처럼 새로운 주제를 시도할 계획이 있을까요?

경록 2월은 추우니까 홍대를 커다란 비누방울로 덮을까 합니다. 아이들은 소리나는 비누방울을 불고 다녀서 터질 때마다 음악 소리가 되게 하고, 비누방울의 원료가 맥주여서 입술에라도 터진다면 기분 좋게 취하겠죠. 거기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우린 하얀 솜 안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겠죠.

사진 제공 © 캡틴락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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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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