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특별한 해였다. 인상적인 스페인 영화가 여러 편 개봉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5편의 스페인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뿌리’다. 각기 다른 소재와 스타일의 영화지만, 보고 나면 나와 나의 집단이 출발한 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결국 더 나은 한 발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페인 영화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반드시 언급될 이름이 있는데, 바로 루이스 부뉴엘이다. 루이스 부뉴엘이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각본을 쓴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나온 지 90년도 더 된 영화이지만 아직도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특히 눈을 칼로 긋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데, 이 장면으로 루이스 부뉴엘은 영화사에 칼자국처럼 선명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 이후 가장 크게 존재감을 알린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작품 외에도 스페인,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스페인어권 영화를 제작하는 데도 힘쓰며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튼튼한 뿌리는 여러 곳으로 뻗어 나가고, 그 결과 스페인 영화는 같은 국가의 감독이 만들었나 싶을 만큼 작품마다 다른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국내 극장에 개봉해서 관객들과 만난, 붉은 빛을 드리운 스페인 영화를 살펴보자.

 

 

<어거스트 버진>

8월 성모승천대축일 기간의 마드리드는 주민들이 휴가를 떠나고, 관광객들이 도시를 채운다. 33살의 ‘에바’(잇사소 아라나)는 마드리드의 한 아파트에서 머물려 시간을 보낸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려는 에바는 박물관에 가고, 영화를 보고, 시내 투어 버스를 타면서 많은 이들을 만난다.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부터 처음 본 사람까지, 에바는 많은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제 수상 경력이 화려하거나 해외에서 이슈가 되지 않은 영화를 국내 극장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행운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어거스트 버진>(2019)은 선물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잔잔함이 오히려 관객에게 특별함을 안겨주는 작품으로,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은 <아름다운 시절>(1992)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의 아들이기도 하다.

에바는 타인에 대한 레이더를 늘 켜고 다니는 사람이기에 많은 이들을 만난다. 해외에서 오거나 타지 생활을 오래 한 이들 사이에서 에바는 마드리드를 떠나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 자신을 찾는 과정에는 정답이 없다. 누군가는 전세계일주를 해도 자기 자신을 찾는 데 실패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만히 제자리에서 생각만 해도 원하던 답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나의 답은 내가 찾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8월 성모승천대축일의 마드리드는 축제의 현장이고, 축제가 필요한 건 인간이라면 근본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고민으로부터 도망칠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패러렐 마더스>

마드리드의 사진작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는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에게 스페인 내전으로 암매장된 조상들의 유해 발굴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에 빠지고 야니스는 임신을 하게 되지만, 유부남 아르투로와 인연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는 걸 느낀다. 병원에서 출산을 준비하는 야니스는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아나’(밀레나 스밋)와 가까워진다. 야니스는 출산 이후 아나와 왕래 없이 지내다가, 자신과 아나의 딸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현시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페인 영화감독으로, 80년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칸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각본상을 받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귀향>(2006),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그녀에게>(2002) 등 대표작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 중이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패러렐 마더스>는 두 사람이 7번째로 호흡을 맞춘 영화로,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 작품을 통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패러렐 마더스>는 스페인 내전 당시 이유도 없이 집단 처형당한 조상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야기를 열고 닫는다. 야니스와 아나는 제대로 된 보호자도 없이 홀로 출산을 하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준다. 조상의 유골 발굴과 임신이라는 서로 다르게 흐르는 것 같던 두 가지 이야기는 여성들의 연대라는 방식을 통해 한 줄기로 합쳐진다. 중년의 야니스와 10대를 막 벗어난 아나에게 스페인 내전의 의미는 다를지 모르지만, 스페인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스페인 내전의 영향은 삶에 직간접적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인간의 솔직한 욕망에 대해 주로 다뤄 온 감독이고, 인간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욕망일 거다. 세상 모든 욕망을 직접 표출하며 살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는 그 어떤 욕망의 표현도 허락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영화로 그려낼 다음 욕망은 무엇이 될까?

 

 

<굿 보스>

저울 회사 ‘블랑코 스케일즈’의 대표 ‘블랑코’(하비에르 바르뎀)는 곧 있을 우수기업 심사를 앞두고 회사 직원들에게 가족다운 회사를 강조한다. 블랑코의 바람과는 다르게 해고된 직원은 복직을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시위를 하고, 20년 넘게 함께 일한 직원은 계속 사고를 치며 블랑코를 곤란하게 만든다. 직원을 가족처럼 여긴다고 말하는 블랑코는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을 보며 초조해한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은 국내에도 개봉한 <어 퍼펙트 데이>(2016)와 <에스코바르>(2017)의 감독으로, <굿 보스>(2021)를 통해 스페인의 가장 큰 영화상인 고야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주연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은 앞에서 소개한 페넬로페 크루즈와 부부이기도 한데, 두 사람 모두 스페인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받고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는 등 스페인을 대표하는 배우로 나란히 활동 중이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오차 없는 공정함과 진실을 상징한다. 블랑코는 저울 회사의 대표지만, 그의 경영 방식은 저울로 측정했을 때 좀처럼 균형이 맞지 않겠다 싶을 만큼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쉽게 ‘회사는 이런 곳이야’라는 말로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순간을 눈감기도 한다. 망가진 저울을 하자가 없는 것처럼 꾸며내는 것만큼, 문화적으로 곪은 부분을 덮어두고 가는 건 쉬운 일이다. 고용된 노동자의 마음과 내가 대표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상상을 번갈아서 하다 보면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다. 잘 만든 블랙코미디 앞에서, ‘굿 피플’과 ‘굿 보스’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일은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고 냉소한다.

 

 

<알카라스의 여름>

카탈루냐의 작은 시골 마을 알카라스에는 3대째 복숭아 농사를 하며 함께 생활 중인 대가족이 있다. 이들 가족의 조상은 과거에 이웃집 가족을 구해주고 농사할 권리를 얻고 농사 중이지만, 문서 없이 구두로만 이뤄진 계약으로 이에 대한 권리를 잃게 생겼다. 조상들끼리 구두로 이뤄진 약속은 무효라고 말하는 현재의 땅 주인은 협상 조건으로 농사 대신 태양전지판을 설치하고 운영해 달라고 제안한다. 집안의 농사를 진두지휘 중인 ‘키메트’(조르디 푸홀 돌체트)는 농사를 포기할 수 없다면서 조건을 거들떠도 안 보고, 가족들은 그런 키메트와 갈등한다.

<알카라스의 여름>(2022)은 카를라 시몬 감독이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 이후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영화로, 그 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작품이다. 감독의 실제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진 자전적인 작품으로, 배우들의 앙상블이 특히 돋보이는 영화다. 놀라운 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대부분이 실제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비전문 배우라는 거다.

복숭아 농사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태양전지판을 설치하면 고생도 덜하고 수입도 더 좋을 거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복숭아는 매출이나 개수 등으로 정량화되는 게 아닌, 과일 이상의 의미다. 생계의 수단이며, 정체성이며, 가족을 유지해온 뿌리이기도 하다. 복숭아를 하나 더 따서 신난다고 말하는 아이들 사이로, 복숭아 농장을 둘러싼 토지 문제, 낮아지는 복숭아 단가 등 복잡한 셈법이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복숭아 농사가 끝난 후 이들의 입에 복숭아의 단맛보다 떫은맛이 더 짙게 느껴진다면, 그건 날씨나 농사 요령 때문이 아닐 거다. 이전처럼 자신들만의 의미로 먹기에는, 너무 많은 의미를 담아버린 복숭아가 되어버렸을 테니까.

 

 

<퍼시픽션>

타히티섬으로 유명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과거에 프랑스가 핵실험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 ‘드 롤러’(브누와 마지멜)는 이곳의 원주민이나 제독 등 유력인사들과 교류한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과 역할에 대해 생각하며 이곳을 떠도는 소문과 주민들의 요구를 듣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핵실험이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퍼시픽션>(2022)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영화 잡지 ‘카예 뒤 시네마’에서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영화 1위로 뽑힌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됐다. 감독 알베르트 세라는 정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로 이름을 알린 감독으로, <내 죽음의 이야기>(2013)로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리베르테>(2019)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주연 배우 브누와 마지엘이 낯이 익을 수 있는데,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다. <퍼시픽션>은 알베르트 세라의 작품 중 처음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핵실험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 상황이 주요 소재일 것 같지만, <퍼시픽션>의 주요 배경은 나이트클럽이다. 영화는 지금 당장 심각하게 다뤄야 할 것을 애써 외면하고 아름다운 섬의 풍경이나 클럽의 환락을 비추는 듯 보인다. 내용 전개에 있어서도 인물들 사이에 말은 오가지만 극적인 행동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퍼시픽션>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정말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이 있음에도 그것을 못 본 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영화적인 시도가 <퍼시픽션>에 특이점을 가져온다. 진짜 봐야 할 것을 외면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현대사회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요함이 더 큰 불안을 만들어낸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