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인기 정상에 올랐던 남매 듀오 카펜터스(Carpenters)의 앨범 <Close To You>(1970)는 롤링스톤(Rolling Stone) 지가 선정한 역대 앨범 175위에 선정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앨범으로 듀오는 그래미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고, 이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으로 그래미 컨템포러리 보컬상을 받았다. 원래 1963년에 인기 작곡가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이 작곡하여 여러 가수에게 주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이 곡을, 오빠 ‘리처드’의 편곡과 동생 ‘카렌’의 청아한 목소리로 리메이크되어 4주 동안 빌보드 톱에 오른 히트곡이 된 것이다. 하지만 ‘카렌’은 오랜 기간동안 그를 괴롭힌 거식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3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고, 더 이상 역대 최고 보컬이라 평가받았던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카펜터스 'Close to You'(1970)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영국 인디 음악계에 ‘카렌’을 생각나게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등장했다. 본명은 사라 조이스(Sarah Joyce), 데뷔 초기에는 잠깐 ‘사라 프렌티스’(Sarah Prentice)라 했다가 동화작가 루머 고든(Rumer Godden)을 따라서 ‘루머’로 예명을 확정했다. 2000년대 초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무대에 홀연히 나타나 인디 밴드 라 혼다(La Honda)의 일원으로 노래했고, 2004년에는 자신의 밴드 ‘Rumer and the Denials’를 조직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밴드 ‘Stereo Venus’에 소속되었다가, 정작 자신의 데뷔 앨범 <Seasons of My Soul>(2010)은 나이 서른을 넘어서야 낼 수 있었다. 모두 자작곡으로 구성하여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보여준 데뷔 앨범은 영국 앨범차트 3위에 올랐고, 2013년까지 100만 장이 팔리며 상업적인 성공까지 맛보았다. 이 앨범을 듣고 가디언(The Guardian)을 비롯한 영국 언론들은 ‘카렌 카펜터’의 이름을 떠올렸고, 이제 60대 중반이 된 ‘리처드 카펜터’는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L.A.에서 살던 ‘Close To You’ 작곡자 버트 바카락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노래를 직접 들었고, 앨범 <Rumer Sings Bacharach at Christmas>(2010)을 함께 작업하기도 하였다.

앨범 <Seasons of My Soul>에 수록한 첫 싱글 ‘Slow’

‘루머’의 이면에 감춰진 가족사가 알려지며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파키스탄 북부의 댐 건설 현장에 파견된 영국인 부모 밑에서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별거하자 다섯 살 무렵에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돌아와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뮤지션으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던 그는, 22세의 나이인 2001년 유방암에 걸려 죽음을 앞둔 어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의 영국인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었고, 생물학적 아버지는 다름 아닌 파키스탄의 집에서 일하던 현지 요리사였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친아버지를 만나러 서둘러 파키스탄으로 향했고, 수소문 끝에 북쪽의 먼 산악지역에 있다는 그를 찾아 나섰다. 한참 산속으로 걸어 올라가 외딴 곳에 찻집 하나를 발견했고, 그곳의 주인에게 친부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사진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인데, 바로 3개월 전에 사고로 죽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Live from Daryl’s House>에 출연한 루머의 ‘No Can Do’(2012)

루머는 플래티넘을 기록한 팝 스타지만, 용모나 옷차림은 무척 수수하다. 무대 뒤편에서 스태프와 뒤섞여 있는 무대 주인공을 분간해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그가 데뷔 앨범을 낼 때까지 10여 년의 무명 시절을 보낸 결과일 지도 모른다. 루머는 한편으로 “그들은 내가 매력적이지 않고, 체중이 많이 나간다며 퇴짜를 놓았어요.”라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 앨범이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이를 실력으로 뒤집었고, 버트 바카락, 엘튼 존, 칼리 사이먼 같은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하지만 첫 앨범의 성공 후 음악 산업의 과중한 압박감으로 인해 조울증과 스트레스 장해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최근에는 다섯 번째 앨범 <Nashville Tears>(2020)을 내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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