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네틱 필즈. 맨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스티븐 메릿, 존 우, 클라우디아 곤슨, 셜리 심스, 샘 다볼

인디 팝의 신. 노랫말의 현자. 멜로디의 장인. 우리 시대의 콜 포터(Cole Porter). 모두 스티븐 메릿(Stephin Merritt)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팀을 만들어 활동하지요. 그런 여러 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세 장짜리 앨범 <69 Love Songs>(1999)로 잘 알려진 마그네틱 필즈(The Magnetic Fields)입니다. 그리고 2017년, 쉰두 살이 된 스티븐 메릿이 마그네틱 필즈의 이름으로 다섯 장짜리 앨범을 발표하였습니다. 제목은 <50 Song Memoir>인데요, 1966년부터 2015년까지 본인이 살아온 50년을 각각 한 곡씩 만들어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총 50개의 노래가 나왔고, 각 곡의 이름은 연도로 시작합니다. 그중에서 먼저 1983년 들어보실까요.

The Magnetic Fields ‘'83 Foxx and I’ MV 

이 노래에도 롤랜드의 전설적인 신디사이저 TB-303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1981년의 노래 ''81 How to Play the Synthesizer'는 아예 제목 그대로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는 방법입니다. 전자음악에 대해 잘 모른다면 조금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는데요, 악기를 사면 같이 딸려 오는 설명서에서 볼 수 있는 전문용어가 난무합니다. "싱글 오실리에이터를 켜고 드론을 만들어 / 그걸 웨이브 셰이퍼로 보내서 톤을 만지고 / 트라이앵글 파형도 괜찮고 쏘우투스나 스퀘어도 좋아 / 진폭을 변조시켜버려 아무도 모를 테니 / 신디사이저는 이렇게 연주하는 거야" 하지만 중간중간 "위스키를 마셔"라든가, “방울뱀처럼 쉭쉭 거리거나 소처럼 음메 하는 소리를 만들어 봐 / 이렇게 저렇게 하면 조그만 금속 엘프를 고문하는 소리가 나지"처럼 수상쩍은 내용도 섞여 있습니다.

The Magnetic Fields ‘'81 How to Play the Synthesizer’ MV 

스티븐 메릿의 가사에서는 기능적인 언어와 감상적인 글쓰기가 음악과 위트를 매개로 8자 모양의 띠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전자제품 뒤에 적힌 주의사항을 그대로 읽고 나서(주의: 감전의 위험이 있으니 임의로 분해하거나 수리하지 말고 전문 서비스 기사를 부르시오) 그걸 내 마음의 묘비에 새겨 달라는 'Epitaph for My Heart'도 그렇지만, "사랑의 책은 길고 지루하죠 / 거기에는 차트와 자료와 수치, 그리고 춤을 추는 요령이 빼곡하게 적혀 있답니다 / 아,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아요 / 그리고 당신은 내게 아무 책이나 읽어주어도 좋아요"라고 노래하는 'The Book of Love'는 그런 종류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곡이죠.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Hallelujah'와 함께 언급되기도 하는 이 노래는 골든두들의 박태성 씨가 정우민 씨에게 프로포즈할 때 불렀습니다. 가사는 청혼에 어울리게 바꿔서요.

The Magnetic Fields ‘The Book of Love’ Live at WFUV

마그네틱 필즈의 첫 앨범은 1991년에 나왔습니다. <Distant Plastic Trees>와 다음 앨범 <The Wayward Bus>(1992)는 수전 앤웨이(Susan Anway)의 맑은 보컬로 가볍고 귀여운 전자음을 활용하였고, 이 시기의 노래 '100,000 Fireflies'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후 스티븐 메릿은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하고 음치라면 음치인 자신만의 저음으로 곡을 녹음하기 시작하는데요, 막상 그렇게 해보니 섬세한 전자음과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우울하고 위트 있는 가사가 함께 어울려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1994년에 발표한 <The Charm of the Highway Strip>은 마그네틱 필즈 고유의 송 라이팅 위에 컨트리 음악의 느낌을 미원처럼 뿌려 만든 앨범입니다.

The Magnetic Fields ‘Born on a Train’ MV 

'Take Ecstasy with Me'를 수록한 네 번째 앨범 <Holiday>(1994)와 'All the Umbrellas in London'을 수록한 다섯 번째 앨범 <Get Lost>(1995)를 발표하며 이전부터 첼로를 연주해주었던 샘 다볼(Sam Davol)과 한국계 미국인으로 기타를 연주해주는 존 우(John Woo)를 멤버로 받아들인 마그네틱 필즈는 1999년 드디어 <69 Love Songs>를 내놓습니다. 스티븐 메릿은 "이 앨범은 사랑에 대한 앨범이 아니다. 사랑과는 거리가 멀게 마련인 사랑 노래에 대한 앨범이지"라고는 합니다만, 신스팝과 로우파이, 기타 팝과 컨트리, 피아노 팝과 발라드, 프리재즈와 월드뮤직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주옥같은 멜로디와 가사를 펼쳐 내는 예순아홉 곡의 노래는 하나하나, 그리고 전체가 하염없이 아름다운 조곡(組曲)입니다.

The Magnetic Fields ‘I Don't Want to Get Over You’ Later...with Jools Holland Live 

<69 Love Songs> 앨범 이후 마그네틱 필즈는 ‘비(非) 신디사이저 삼부작’을 발표합니다. 'It's Only Time'을 수록한 <i>(2004)는 주로 기타와 첼로로 풀어낸 앨범이고,  'California Girls'를 수록한 <Distortion>(2008)은 디스토션과 오버드라이브의 노이즈를 겹겹이 발라 만들었죠. 'Seduced and Abandoned'를 수록한 <Realism>(2010)은 그와 짝을 이루어 어쿠스틱을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앨범은 다시 주로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Love at the Bottom of the Sea>(2012)였죠.

The Magnetic Fields ‘Quick!’ MV

클라우디아 곤슨(Claudia Gonson)은 마그네틱 필즈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해왔습니다. 스티븐 메릿과 고교 시절에 만나 친구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음악 활동을 하면서 피아노도 쳐주고, 드럼과 타악기도 쳐주고, 노래도 불러 주고, 매니저의 역할도 해주고 있지요. 한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메릿의 노래에는 주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 이 사회의 동성애 혐오가 이렇게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면, 게이에 대한 이슈는 덜 폭력적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너무 성 정체성의 이야기로 몰아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마그네틱 필즈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일부러 레즈비언, 게이 남자, 이성애 여자, 이성애 남자, 이렇게 네 명으로 팀을 만들었어요. 어떤 관객이 오더라도 그중 한 명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죠."

The Magnetic Fields ‘Andrew in Drag’ MV 

그리고 이제, <50 Song Memoir> 앨범이 나왔습니다.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주옥같은 멜로디와 가사를 펼쳐 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 느낌입니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노래할 뿐이지만, 그렇게 꺼내 놓는 한 해, 한 해는 듣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부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어린 시절에서 청년으로 자라 중년이 되기까지, 누구라도 기억에 남는 기쁨과 슬픔, 우울함과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앨범은 그런 감정을 하나씩 꺼내서 맛을 보는 초콜릿 다섯 상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아직 나이가 쉰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미리 꺼내 볼 수 있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여러 해가 지나 다시 열어 볼 수 있는. 물론 어떤 초콜릿 안에는 위스키가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만.

The Magnetic Fields ‘'68 A Cat Called Dionysus’ MV

이번 앨범에는 특이한 규칙이 있는데요, 한 곡에 일곱 개 이상의 악기를 쓸 수 없고, 한 악기는 앨범 전체에서 일곱 번 이상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악기가 동원되었지요. 곡의 수가 많기 때문에 공연도 이틀로 나누어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티븐 메릿은 일정 음량보다 큰 소리가 왼쪽 귀로 들어오면 피드백 현상이 일어나 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청각 과민 증세가 있기 때문에 공연에서 드럼은 사용하지 않고 타악기도 최소한으로 편성한다고 합니다. 귀마개를 하고 공연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객이 손뼉을 너무 크게 치면 손으로 귀를 틀어막지요. 이것 참 만약 공연을 보게 된다면 손뼉을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한국에서도 마그네틱 필즈를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The Magnetic Fields ‘'71 I Think I'll Make Another World’ MV

 

Writer

골든 리트리버 + 스탠다드 푸들 = 골든두들. 우민은 '에레나'로 활동하며 2006년 'Say Hello To Every Summer'를 발표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2012년 IRMA JAPAN 레이블에서 'tender tender trigger' 앨범을 발표하였다. 태성은 '페일 슈', '플라스틱 피플', '전자양'에서 베이스 플레이어로, 연극 무대에서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최근에 여름과 바다와 알파카를 담은 노래와 소설, ‘해변의 알파카’를 발표하였다.
http://www.goldendoodlepop.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