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과는 평생 함께할 것만 같았다. 그가 늙는 것,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것, 나의 기쁨과 슬픔, 인생의 다양한 일. 모든 것을 나누며 지금과 같은 시간을 언제까지나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람은 쉽게 꺾였고, 결코 실현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주변의 어떤 위로도 와닿지 않는다. 도리어 마음은 삐딱하다.

“잘 보내드리자.” “나는 아직 보내고 싶지 않아.”
“멀리서 지켜볼 거야.” “곁에서 지켜봤으면 좋겠단 말이야.”
“힘내.” “무슨 힘을 내라는 거야?”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야속하게도 다른 이들의 일상은 어제와 같다. 이 슬픔과 상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살아야 하나? 나와 같은 처지인 이들은 이 마음을 어떻게 추슬렀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라고 배운 적도 없다.

올곧게 애정을 주던 강아지, 고양이, 평생 서로에게 힘이 되자고 약속했던 친구, 세월 속에 빠르게 노쇠해진 조부모님,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만큼 의지가 되었던 형제, 누구보다 나를 믿어준 부모님. 내 인생에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랑.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길을 잃은 당신을 위해 결코 끝나지 않을 이 슬픔과 마주하는 법을.

 

나는 그대의 이름을 끝없이 부르노라, 김소월 '초혼'

근대문학100년 연구총서, <진달래꽃>에 수록된 시 '초혼'

이 세상을 떠난 혼을 불러내 다시 살려 내겠다는 의지로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는 상례 의식의 한 절차를 초혼이라고 한다. 시인 김소월이 사랑했던 원옥을 떠나보내고 절절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담겨있다.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애타게 불러보지만 네가 있는 곳이 너무 멀어 결코 내 부름이 너에게 닿지 않는구나 비탄에 잠길 뿐이다.

그 이름을 불러봤자 대답해 줄 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이름만 외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직 그에게는 그 부름에 대답해 주던 목소리와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는 이 의식은 결과적으로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라고 하니, 대답 없는 이를 부르는 것은 그가 없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가슴에 맺힌 한으로 이름만이라도 불러보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놓아주라는데, 놓아준다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지식in>

이미지 출처 - 링크

2018년, 지식 in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키우던 토끼가 세상을 떠나고 사진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이제는 놓아주라고 하는데, 저는 토끼를 잊고 살아야 하는 걸까요?”

3년 뒤, 누군가가 질문자의 안부를 물으며 ‘놓아준다’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사랑했던 대상이 물리적으로 곁을 떠났을 때 ‘놓아준다’는 것은 추억, 경험, 감각을 모두 추상적인 당신의 바다에 쏟아붓는 것이라고. 바다에 놓아준다면 언제든 그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그 바다에 가면 된다고. 시간이 지나면 그 추억들이 바다에서 옅어지겠지만 그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사려 깊은 대답이다.

다만 ‘소중한 존재’가 ‘소중했던 존재’로 충분해진다는 마지막 문장이 아쉽다. 바다에 간직해둔 나의 기억은 모두 잠시 풀어놓은 것일 뿐, 결코 옅어지지 않는다. 넓은 바다에 떠다니다가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마음에 들이닥친다. ‘소중했던 존재’가 아니다. ‘소중한 존재’로 항상 마음에 품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장나버렸다. 영화 <데몰리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는다. 아내가 죽고, 자신의 돈을 먹어버린 고장 난 자판기 회사에 보낼 항의 편지에 아내가 죽어버렸는데도 눈물이 나지 않는 자신이 문제라고 하며 구구절절 사연을 적어 보낸다. 그는 점점 더 이상해진다. 물이 새니까 고쳐달라는 아내의 메모가 남긴 냉장고를 모두 분해해버리고, 잘 달리던 열차를 갑자기 멈춰버려 조사를 받기도 하고, 건물을 부수는 공사현장에 오히려 돈을 주고 참여해 파괴하고, 결국 자신의 집도 부수기 시작한다. 영화 제목인 'demolition'은 파괴를 뜻한다.

“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슬프게도 그녀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그럼 어떤데요?”
‘(갑자기 긴급 멈춤 레버를 내린다)’

슬픔, 공허, 상실, 허무.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결국 고장이 났다. 이상한 충동에 휩쓸린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 같은데 하나같이 파괴적이다. 그는 망가졌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슬프지도 않다고 말한다.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방어기제와 파괴라는 행동 패턴이 작동된다. 그가 현실을 직면하고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런 시간이 걸렸다. 지나친 슬픔은, 그 슬픔 자체를 마주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마이클 로젠 <내가 가장 슬플 때>

아들을 잃은 작가가 있다. 1970년부터 어린이 책을 쓰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슬픔을 담은 그림책을 하나 냈다. 작가는 마이클 로젠, 그림은 퀜틴 블레이크, 제목은 내가 가장 슬플 때, 원제는 'Michael Rosen's Sad Book.'

글보다 그림이 크고, 매 페이지마다 그림이 있는 이 책은 어린이 책이지만, 누군가를 잃은 어른들도 책 속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은 내내 깊은 슬픔에 잠겨 있고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도 전하지 않는다. 대신 정의 내릴 수 없던 슬픔이 마이클 로젠이 겪는 슬픔과 같아서 내 슬픔이 어떤 형태로, 언제 찾아오는 건지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나만 이 슬픔을 겪는 게 아니라는 동족을 발견했을 때의 아주 작은 위안까지. 그림을 그린 퀜틴 블레이크는 첫 장면인 ‘슬플지만 행복해 보이는 척’하는 주인공을 그리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어머니라면 좋겠는데, 어머니도 이젠 여기 계시지 않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에디에 대해 말하기가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습니다. 아무에게도. 전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마음속으로 혼자서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내 슬픔이니까요. 다른 누구의 슬픔도 아니니까요.

야속하게도 삶은 어찌저찌 흘러간다. 마음속 바다에 그를 잘 풀어두자. 이따금 파도가 칠 때 그를 떠올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불러보고 안부를 묻고 내 소식을 전한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막연하게 빌어본다.

 

Writer

좋아하는 것들을 쓴다. 좋아하는 이유를 열렬히 말하며 함께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