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영화를 떠올려보라고 했을 때 노르웨이의 영화를 떠올리는 이들은 많지 않을 거다. 노르웨이 출신 배우라면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에 주로 출연한 리브 울만을 떠올리겠지만,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감독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희망적인 건, 몇 년 전부터 평단과 관객 사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노르웨이 감독이 있다는 거다. 그는 바로 국내에도 개봉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다.

5편의 장편 영화를 발표한 요아킴 트리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활동 중인 감독이다. 데뷔작 <리프라이즈>(2006)는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되고, <오슬로, 8월 31일>(2011)은 한 인물을 계속 쫓는 느린 호흡의 영화이고, <라우더 댄 밤즈>(2015)는 미국 진출작이자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도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며, <델마>(2017)는 호러와 판타지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즉, 요아킴 트리에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매 작품마다 비슷한 시도 대신 늘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는 그의 장점들을 고루 섞은,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꿈, 사랑, 관계 등 추상적일 수 있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몇 년 후에는 노르웨이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인 화가 뭉크처럼,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요아킴 트리에가 거론될지도 모른다(요아킴 트리에는 <디 아더 뭉크>(2018)라는 뭉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다).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노르웨이 오슬로를 걸으면서 사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뭉크의 그림과는 다른 매력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을 살펴보자.

요아킴 트리에 감독(가운데), 이미지 출처 – imdb

 

<리프라이즈>

‘에릭’(크리스티안 루벡)과 ‘필립’(앤더스 다니엘슨 리)은 절친한 사이로 둘 다 작가를 꿈꾼다. 둘 중 필립은 먼저 작가로 이름을 알리지만, 자살 시도로 인해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온다. 에릭은 퇴원하는 필립을 집에 데려다주고, 그와 교류하면서도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해서 준비한다. 둘은 계속해서 함께 하지만, 각자의 삶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리프라이즈>(2006)는 요아킴 트리에가 몇 편의 단편 영화를 발표한 이후로 연출한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영화 중간중간 독특한 인서트샷이 등장하고, 내레이션의 사용이나 편집의 리듬도 전형적이지 않다. 데뷔작은 능숙함보다도 얼마나 개성 있는지 보여주는 게 관건일 텐데, 그런 면에서 <리프라이즈>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뷔작이다.

<리프라이즈>는 에릭과 필립이 우체통에 자신들의 원고를 집어넣으며 훗날 유명 작가가 될 모습을 상상하며 시작한다. 같은 꿈을 꾼다는 건 서로에게 자극과 응원이 되고, 오래 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다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서로의 삶은 여러 변수를 통해 다른 방향으로 가곤 한다. 함께 같은 꿈을 향해 가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너무 달라진 서로를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겪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저 가고 있는 그 길이 그 어떤 선택보다도 만족스럽기를 바라며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다.

 

<오슬로, 8월31일>

‘안더스’(앤더스 다니엘슨 리)는 약물 중독으로 재활 클리닉에 입원해 있다. 그런 그에게 면접의 기회가 주어지고, 밖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면접에 앞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자신의 과거 연인에게 연락을 해본다. 안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된다.

<오슬로, 8월 31일>(2011)은 루이 말 감독이 1963년에 영화화했던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소설 <도깨비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요아킴 트리에는 <리프라이즈>, <오슬로, 8월 31일>,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까지 세 편을 묶어서 ‘오슬로 3부작’이라고 밝혔다. 세 편에는 공통적으로 요아킴 트리에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앤더스 다니엘슨 리가 등장한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하나 같이 모두 죽음과 맞닿아 있다.

<오슬로, 8월 31일>은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정적인 작품으로, 한 인물의 하루를 쫓으면서 우울과 후회 등 다양한 감정을 보여준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8월 31일쯤, 노르웨이 오슬로에는 백야가 찾아온다. 하늘만 봐서는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시기이지만, 어두운 감정은 규칙적으로 빠짐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언젠가 오슬로를 갈 수 있다면 8월 31일에 직접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 속 풍경을 떠올리며 걷고 싶다. 온갖 감정과 함께하느라 지루하지 않은 여행이 될 테니까.

 

<라우더 댄 밤즈>

‘이자벨’(이자벨 위페르)은 종군 사진기자로 이름을 알렸지만,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 ‘진’(가브리엘 번)과 둘째 아들 ‘콘다르’(데빈 드루이드)는 한집에 살지만 콘다르는 진과 대화하기를 거부한다. 첫째 아들 ‘조나’(제시 아이젠버그)는 이자벨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셋의 관계는 어색하기만 하다.

<라우더 댄 밤즈>(2015)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첫 미국 진출작이다. 타국 감독들이 할리우드 진출 시 타인의 각본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요아킴 트리에는 데뷔작부터 자신과 함께해 온 시나리오 작가 에실 보그트와 함께 직접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했다. <라우더 댄 밤즈>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그 어떤 폭탄의 폭발음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게 상실이라는 걸 느끼게 할 만큼, 이자벨의 죽음은 가족들의 삶에 제각각의 형태로 변화를 만들어낸다. 같은 죽음 앞에서도 애도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이자벨은 직업 특성상,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다. 이자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도, 자신이 부재했던 몇 달 동안 남은 가족들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일상이 자신이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없는 게 당연한 집 안에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희미해지는 만큼, 일터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게 오히려 가족들에게 더 크게 기억되는 방법 같아서 더 치열하게 일을 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가족끼리 서로에 대해 정말 솔직하게 소통했다면, 이자벨의 가족들은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가족이 소중하고 가깝다고 말해도 가장 어려운 관계라는 건, 어느 국가에 어느 집을 가도 비슷할 것이다.

 

<델마>

‘델마’(에일리 하보)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작은 일 하나만 생겨도 바로 부모님에게 보고하는 대학생이다. 어느 날 델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발작을 일으키며 기절하고, 이를 계기로 ‘아냐’(카야 윌킨스)와 가까워진다. 아냐 덕분에 델마는 낯선 이들과 교류하고 파티에도 참여하는 등 이전에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한다. 델마는 아냐와 점점 친해지는 가운데, 자신의 상상에 따라 자꾸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게 된다.

<델마>(2017)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 중 호러와 판타지의 성격을 가장 짙게 띤 작품이다. 마치 북유럽 신화에 나올 법한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로, 요아킴 트리에가 장르와 분위기를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특히나 부감이 많이 나오는 영화인데, 세상이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델마도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잘 섞여서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세상은 독특한 사람을 포용하기보다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특이함을 곧 리스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에, 지금 당장 초능력을 가진 이가 등장해도 능력을 펼치기보다 격리당한 채 살 확률이 높아 보인다. 남과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을 그려낸 히어로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요아킴 트리에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철저히 한 개인의 감정에 집중한다. 결국 누군가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건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감정일 테니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는 의학 전공생이었으나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사진을 공부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한다. 매번 새로운 도전에 따라 그 분야에서 만난 이들과 사랑에 빠지던 중,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과 연애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적당히 삐걱거리면서도 동거 생활을 유지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율리에는 초대장도 없이 들어간 파티장에서 만난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는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12장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다. 주연을 맡은 레나테 레인스베는 <오슬로, 8월31일>을 통해 데뷔한 배우로, 이 작품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제목부터 최악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율리에의 방황은 최악으로 보이기보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민처럼 보인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보다 더 나은 최선의 선택이 있을 것만 같고, 때로는 그러한 희망이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최선이 있을 거라는 가정이 현재를 몰입하고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지금의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지도 몰라,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최선을 찾아 방황할 동안, 지금 내 옆에 있는 누군가는 나를 최악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제목을 보면서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최종결정을 하기에, 가장 많은 미움을 받는 사람일 거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들조차도 영화 현장이 주는 압박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좋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많은 이들에게 최악으로 기억되더라도 그 선택을 할 거고, 그렇기에 감독들은 ‘영화를 찍을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고 말하고 싶을 거다. 영화 대신 꿈, 사랑 어떤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된다.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최악으로 기억되더라도 내 소신껏 선택하고 전진하는 게, 괜찮은 척 휩쓸려 사는 것보단 후회가 덜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새해 결심과 제법 잘 어울리는 영화다. 새해에는 타인에게 기억될 내 모습보다도, 진짜 내가 원하는 모습을 위한 선택이 늘어나기를.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