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있다. 여름엔 댄스 뮤직이 듣고 싶고, 겨울에는 R&B나 재즈의 따뜻함을 찾게 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음악에서 따뜻함과 시원함을 느끼는 걸 보면 어쩌면 소리는 청각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하는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날 거리를 헤매다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재즈가 흘러나오면 따뜻한 난로를 마주한 것 마냥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일이나 크리스마스 영화엔 유독 오래된 재즈가 많이 흘러나오는 것도 근거로 삼아볼 수 있지 않을까? 겨울에 어울리는 오래된 재즈 스탠다드를 찾고 있다면 오늘 소개할 곡들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겨울만이 줄 수 있는 고독함, 차분함 그리고 이런 마이너스 감각을 상쇄시켜줄 따뜻함 한 스푼을 곁들인 곡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빌리 홀리데이 ‘Blue Moon’

이미지 출처 © PolyGram Records, Inc.

1934년에 작곡된 블루문은 정식 발매까지 쉽지 않은 여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끝이 창대한 것이 더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는가? 영화 배경 음악으로 시작한 초기의 블루문은 ‘The Bad in Every Man’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후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까지 손을 본 뒤 지금의 ‘Blue Moon’으로 US 차트에서 1949년에 히트를 하게 된다. 곡은 파란 달을 바라보며 진정한 사랑을 위해 기도하고나니 진짜 사랑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고독함을 극복한 사랑 노래다. 빌리 홀리데이는 여기에 유혹의 감성 한 스푼을 더해 매혹적인 버전으로 탄생시켰다. 투명한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피아노 연주와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추운 겨울 밤 재즈 클럽 문 뒤로 펼쳐지는 황홀한 세계로 데려가는 듯하다.

빌리 홀리데이 ‘Blue Moon’

블루문은 많은 뮤지션의 사랑을 받은 곡이라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줄리 런던, 엘라 피츠제럴드, 딘 마틴, 쳇 베이커, 프랭크 시나트라, 밥 딜런, 리암 갤러거의 비디 아이 등이 블루문을 커버했다. 빌리 홀리데이의 버전에 추가로 추천하자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문과 리암 갤러거가 맨시티 응원을 위해 작업한 ‘Blue Moon + The Beat Goes On’을 뽑고싶다. 록스타의 애잔한 사랑 노래는 놓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Blue Moon’

 

엘라 피츠제럴드, 루이 암스트롱 ‘Cheek To Cheek’

이미지 출처 © Verve Record

현재까지 발매된 ‘Cheek To Cheek’ 커버는 무려 500개가 넘는다고 한다(참고 Secondhandsongs.com). 국내에선 얼마 전 미노이가 자신의 대학 입시 곡이었던 ‘Cheek To Cheek’ 커버를 크리스마스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다. 곡은 ‘말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슴 떨리는 상대를 만나 천국에 있는 듯’하다는 얘기의 사랑 노래다. 곡은 어빙 벌린이 뮤지컬 영화 <Top Hat>(1935)을 위해 작곡한 음악이다. 주인공이자 위대한 춤꾼 프레드 아스테어는 파티에서 ‘Cheek To Cheek’을 부르며 여주인공 진저 로저스와 뺨을 마주댄 채 춤을 춘다. 둘은 무도회장에서 나와 로비에서 탭댄스를 펼치는 데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스탭과 진저 로저스의 휘날리는 파란색 퍼 드레스 그리고 클라이맥스로 치달은 음악까지 삼박자가 딱 떨어지는 명장면이 아닐 수가 없다.

프레드 아스테어 'Heaven' (영화 <Top Hat> 중에서)

애초에 댄스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곡인 만큼 이후에 커버된 버전도 스윙을 살린 곡들이 많았다. 루이 암스트롱과 엘라 피츠제럴드의 ‘Cheek To Cheek’은 오히려 차분하게 시작된다.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은 저 뒤편에서 잔잔하게 연주를 펼쳐나가고, 루이와 엘라의 목소리가 앞에서 차분하지만, 힘있게 곡을 이끌어나간다. 이따금 색소폰 연주가 이들의 목소리를 뚫고 나오며 존재감을 더할 뿐이다. 역사가 깊은 작은 재즈 바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루이와 엘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온기로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잊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제목처럼 서로의 뺨을 맞대고 말이다.

엘라 피츠제럴드, 루이 암스트롱 ‘Cheek To Cheek’

 

버드 파웰 ‘I’ll Keep Loving You’

이미지 출처 - 링크

음악은 감각만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게 만드는 힘도 지닌 게 분명하다. 버드 파웰의 ‘I’ll Keep Loving You’를 듣고 있으면 눈으로 뒤덮인 숲 속의 오두막, 그리고 그 안에 타오르는 벽난로가 연상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오두막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터질듯한 마음이 타오르는 장작으로 표현되는 그런 장면이다. 가사도 없는 피아노 연주곡이지만 당신을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뜨겁게 전달된다. 버드 파웰은 공격적인 피아노 연주로 알려졌기도 하다. 마치 색소폰이나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를 연주하듯이 피아노를 두드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음의 상승과 하강을 뜻하는 아르페지오가 자주 등장해 감정을 요동치게 하여 음악을 듣다 보면 울컥하기까지 하다. 이번 겨울, 숲 속의 오두막에 놀러 가진 못하더라도 고요한 겨울 밤 낭만을 느끼고 싶을 때 들어봐야 할 곡이다.

버드 파웰 'I’ll Keep Loving You'

 

사라 본 ‘Misty’

이미지 © Paul Hoeffler, 출처 - 링크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사라 본이 등장한다. “셰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가느라 달그락 소리가 나는 뒤쪽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을 부르고 있었다.” 사라 본의 러브 송이라 하면 ‘The More I See You’, ‘Me And My Only Love’ 등 몇 가지 후보가 떠오르지만, 위스키 소다를 마시며 주방의 잔잔한 소음과 함께 들리는 러브 송으론 ‘Misty’가 제격이 아닐까 싶다. 오케스트라 연주와 사라 본의 절제된 보컬이 은빛으로 물든 겨울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1954년에 에롤 가너가 작곡한 ’Misty’는 물결이 치는 듯한 가볍고 구슬 굴러가는 듯한 피아노 연주가 아름다운 곡이다. 여기에 조니 마티스가 가사를 붙여 발표한 뒤로 엘라 피츠제럴드를 포함한 많은 뮤지션들이 가창 버전을 발매하게 됐다. 누군가는 조니 마티스의 미스티 혹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미스티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한겨울엔 목소리만으로 무드를 창조해내는 사라 본의 버전을 들어보자.

사라 본 ‘Misty’

 

쳇 베이커 ‘Time After Time’

이미지 © Bobby-Willoughby

겨울의 추운 날씨와 잿빛 풍경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울적함을 주기도 한다.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노력보다는 울적함을 환대하며 나름 적응해보는 것도 겨울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돼줄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은 순간 쳇 베이커의 음악의 도움을 받아보자.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들으면 순식간에 깊은 흑암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느슨하고 유악한 멜로디때문도 있겠지만, 음악만큼이나 유명한 그의 자기 파괴적인 생애가 같이 떠올라서이기도 하다. 곡에서 쳇 베이커는 당신을 사랑하게 돼서 행운이라고 당신이 나의 사랑을 젊고 새롭게 지켜줬다고 고백한다. 가사는 달콤한데 목소리에선 쌉싸름한 맛이 느껴진다. 그는 지나가는 세월이 알려줄 거라고 노래하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결말을 알고 듣는 느낌이 드는 신비한 곡이다.

쳇 베이커 ‘Time After Time’

 

Writer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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