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은 대개 욕망한다, 부와 권력, 생활의 안정, 타인과의 관계 혹은 한 잔의 모닝커피나 10분의 낮잠을. 대개는 더욱 만족스러운 하루, 더 행복한 삶을 바라는 것이 ‘보통’, 그 구체적인 형태는 개인마다 다를 테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까닭 중 하나는 현실에선 꿈꾸기도 힘든 별난 것들을 욕망하고 상상하며 때로 실현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캄캄한 극장에 앉아 다채롭게 타오르는 붉은 빛에 취했던 경험은, 현생에서 다르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이 붉지 않다면, 무지갯빛도 아니라면, ‘썩어가는 녹색’(영화 <그린 나이트>)조차 띠지 않는다면. 탁한 블루, 혹은 무의 흰색이나 까마득한 검정이라면 어떨까.

이 주인공들에게는 좀처럼 욕망이 비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이 생이 아니라 사를 향한다. 진지하게 죽음을 계획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중 몇에겐 그럴 의지조차 남지 않은 듯하다. 날마다 조금씩 혹은 틈날 때마다 간헐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고립시킨다. 그 까닭을 영화는 분명히 설명하거나, 은근히 암시하거나, 끝까지 공백으로 남겨둔다. 특별한 타인과 함께 삶에 변화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결국 최종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무욕이나 자기파괴욕이 어른거리는 다섯 남자의 심연을 들여다보자.

 

헨리(애드리언 브로디) of <디태치먼트>(2011)

<디태치먼트>에는 학교와 교사의 역할에 관한 사유가 담겨 있다. 보기 좋은 해결책으로 다독여 덮는 대신 날것의 고민을 흩뿌려 놓았기에 와닿는다. 화면은 관찰하듯 조심스럽게 흔들린다. 도중 콜라주나 인용 등으로 개성을 더하기도 한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동시대 학교 안팎의 울타리 주위를 맴도는 이들을 향한 애정이 비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기간제 교사인 ‘헨리 바스’. 작품은 그의 시선을 빌려 교실과 거리를 살피는 사이 개인의 마음속 풍경 또한 그린다. 헨리는 언뜻 차분하고 안정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감정을 절제하나 아주 말라 있지는 않고, 태도는 무심한 편이나 자상함이 배어 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으나 필요한 말은 꼭 하고, 거리를 존중하며 타인을 챙길 줄 안다. 그러나 상대를 향해 미소 지어도 때로 다른 생각에 빠진 눈빛을 띄곤 하는 그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미 지쳐버린 듯도 한 남자다. 냉소적인 여유는 어쩌면 사람에게 애초에 별 기대를 하지 않기에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톤과 완전히 어우러진 애드리언 브로디의 신중하고 깊은 연기는 관객이 적절한 속도로 인물의 내면에 다가갈 수 있게 도왔다.

그의 삶에 변화를 불러오는 존재는 거리에서 몸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십대 ‘에리카’(사미 게일). 이들은 우연히 만나 함께 지내며 점점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발전한다. 드디어 헨리의 입가엔 그늘 없는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학교와 집 각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십대들과의 만남은 상호 영향을 미치고, 고민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것은 버스 안, 조부가 입원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던 헨리는 등받이에 무기력하게 몸을 기댄 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엉망으로 무너지고 마는 순간은 가족과 연결돼 있다. 작품은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을 편집해 넣어 그에게 있는 일상적 피로와 우울의 뿌리를 암시한다. 괴로움과 한데 엉겨버린 피붙이의 정. <너는 여기에 없었다>, 조의 가슴에 얹힌 덩어리에도 유사한 데가 있었다.

 

조(호아킨 피닉스) of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라인업만으로 기대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어떤 예상을 했건 그것을 저버리는 작품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각 분야의 마스터들이 만났다. 린 램지의 실험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조니 그린우드의 독특하고 감각적인 음악, 호아킨 피닉스의 폭발적이면서도 섬세하게 흔들리는 연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넘어 전에 없이 불편하고 몰입감 넘치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주인공 ‘조’는 청부업자, 일명 ‘해결사’다. 폭력을 즐기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다. 일처리를 위해 효율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총을 쏠뿐이며, 영화 역시 그 모습을 유흥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첫 장면, 조는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숨을 참고 있다. 어린 시절 당한 폭력,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인으로 머무르며 겪고 행한 일들… 조는 끊임없이 기억에, 자신과 어머니의 생을 끝내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린다. 어머니는 살아갈 이유인 동시에 그를 묶고 있는 과거다. 멍하게 뒤엉킨 무기력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분노를 동시에 품고 있다 때로 그것을 터트리는데, 그럴 때마다 상대를 파괴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파괴하는 것 같아 보인다.

조는 한 상원의원의 의뢰를 받고 납치된 그의 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찾다, 결국 진심으로 구하게 된다. 숫자를 거꾸로 세는 니나에게서 제 과거를 발견하고, 그가 바로 자신의 현재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나이 든 남성이 어린 여성을 구하는 일방적 서사를 취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카페테리아 시퀀스는 이것이 일종의 ‘상호 구원 서사’ 임을 분명히 전한다. 서늘한 충격과 함께 그림자를 드리우곤 별안간 실버라이닝을 쏘아 주는데, 가슴을 건드리는 온기가 완전한 안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도 여전히 한구석에 위태로운 긴장이 달라붙어 있다.

 

타츠오(아야노 고) of <그곳에서만 빛난다>(2014)

‘타츠오’는 온통 늘어지고 찌들어 있다. 더벅머리도 가리지 못한 날카로운 눈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드러내는 어깨의 굴곡, 슬리퍼를 질질 끄는 발. 대충 주워 걸친 듯한 실루엣 그대로 어떤 멋이 있다. 배우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의도된 연출이다. 카메라는 자주 타츠오를 관찰하듯 클로즈업하고, 그는 시선의 주체와 객체를 오가며 좀처럼 이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히 미스터리한 인물은 아니다. 타츠오의 상태는 사고로 동료가 죽은 사건에 기인하며, 영화는 적절한 때에 이를 관객에게 설명한다. 이후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사해 이끌리는 대로 매일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주로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선 때로 숨을 틀어막고 팔다리를 굳게 만드는 공포가 감지된다. 커다란 바위에 짓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친코에서 우연히 만난 타쿠지를 따라가 ‘치나츠’(이케와키 치즈루)와 만나며 타츠오는 비로소 내일을 그리게 된다. 그를 붙들고 있던 것은 그 자신뿐이었으므로. 어쩌면 앞서 다룬 헨리나 조와 더 닮은 것은 치나츠일지도 모르겠다. 병든 아빠와 그를 돌보느라 지친 엄마, 감옥에서 막 출소한 동생까지, 온 가족을 부양하느라 종일 일하고도 밤에 가게에 나가야 하는 치나츠. 새로운 관계는 물론 설레고 소중하다. 그러나 타츠오의 것과 달리 그의 바위는 실체를 갖고 있다. 발목에 친친 감긴 매듭에 달려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

그가 그녀의 무게를 함께 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작품은 겨우 붙잡은 희망의 실을 끊어버린다. 그럼에도 끝내 그들에게서 서로를 앗아가지는 않는다. 감정을 아주 분출하기보단 안으로 꾹꾹 눌러 담았던 아야노 고와 이케와키 치즈루, 능청스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던 신스틸러 스다 마사키, 그들의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얼굴을 끌어낸 오미보 감독, 날것의 빛으로 가득했던 화면… 이 지독한 작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몬테(로버트 패틴슨) of <하이 라이프>(2018)

창세기를 모티브로 한 실험적이고 기이한 SF <하이 라이프>. 이 작품은 이미 이야기가 진행되어 ‘몬테’와 갓난아이만 남은 시점에 관객을 던져 놓은 후, 서서히 과거의 사건들을 보여주며 정서를 뒤튼다. 배경은 고립된 우주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태우고 블랙홀로 향하는 ‘수어사이드 미션’을 띠고 있다. ‘박사’의 독재 하에 인체 실험을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디스토피아 에덴, 인간의 법을 어긴 아담과 이브 후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인간을 혐오한다.

박사는 자신의 욕망에 화답하지 않는 몬테를 향해 비꼬듯 말한다. “Monk.” (수도승) 그는 과연 수도승 같기도 하다. 이제껏 다룬 인물들을 다 모아 놓아도 몬테에겐 차원이 다른 무욕의 기운이 있다. 대개 텅 비어 있는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서서히 죽어가는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남은 날을 셈하며 죽음의 속도를 자의로 조금씩 높이고 있는- 자 같다. 지구에 있던 날들의 기억이 파편적으로 등장하기는 하나, 작품은 그의 ‘까닭’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에게 찾아온 타인은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잉태된 아이 ‘윌로우’(제시 로스). 몬테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존재는 그에게 클리셰적으로 생의 희망을 불어넣는 대신 오히려 절망의 확신을 부여한다. 몬테는 ‘인간의 본능’, ‘종 유지의 의무’ 따위를 따르지 않고 윌로우와 함께 블랙홀로 들어가며 자기파괴를 완성한다.

로버트 패틴슨은 이 묘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에 완전히 스며들었고, OST ‘Willow’를 부르기도 했다. 첫 관람을 마친 후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흐르는 엔딩크레딧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한동안 이 이야기가 머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닐(팀 로스) of <썬다운>(2021)

많은 관객이 미셸 프랑코의 <썬다운>에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겹쳐 보았다. 나 역시 ‘닐’에게서 ‘뫼르소’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두 남자의 차이는 국적이나 시대, 계급에만 있지 않았다. 뫼르소는 살고 싶어 했다, 실재하는 지금 이 순간을. 까뮈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생생한 생의 욕망을 부여함으로써 그가 겪은 부조리를 독자가 더욱 실감케 했다. 닐은… 매초를 ‘죽이면서’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Killing time and killing himself at the same time.). 어쩌면 몬테와 비슷한 데가 있는, 스스로 가라앉는 자의 정서가 있었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닐이 겪는 굵직한 사건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어머니가 죽었다’, ‘동생이 죽었다’, ‘동생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병원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그러나 닐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대신 낯선 휴양지에 머무르며 햇살과 맥주에 몸을 맡기고, 그곳에서 만난 이와 낮과 밤을 보낸다. 주변과 관객은 비일상의 직후를 지나는 그의 일상적 태도에서 이상과 불편을 느낀다. 그러나 닐은 가족들이 화를 내고 연을 끊어도 제 행동에 대해 설명할 생각을 않고, 일말의 억울함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동생과 조카들을 향한 슬픔과 애정은 진심으로 보이지만, 그 감정은 하루를 대하는 태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닐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모래알로 흩뜨리는 중이었을까, 그러나 만성적인 자기파괴욕은 병에 대한 인지보다는 타고난 계급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듯했다. 굳이 미셸 프랑코의 전작이 <뉴오더> 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억만장자 2세’라는 설정은 닐에게 불로소득을 주기 위한 픽션적 허용보단, 그가 살아갈(죽어갈) 방식을 결정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에 가깝다고 해석되었다.

오늘은 여기 존재하지만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저물기를 기다리는 나날들. 썬다운적 분위기에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보편의 잣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화자에 이입해 극을 이끌었던 팀 로스의 역할이 컸다. 그의 멍한 얼굴에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깊이가 있었다.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간 닐은 끝내 영화의 프레임에서도 벗어난다. 내내 인물의 속도와 온도를 따라 움직였던 카메라는, 그의 빈자리를 가만히 비춘다.

 

Writer

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안 쓰지 못해 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픽션에 과몰입하고 듣던 음악을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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