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영국에서 부르주아로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낯선 멕시코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간 예술가 리어노라 캐링턴. 기성 관습에 의문을 던지고 현실 이면의 신비로움을 탐구해온 그녀의 작품은 현재에도 여전히 강렬하게 마음을 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풍경이 매혹적이면서, 낯선 존재들의 기이한 병치가 어딘가 무섭고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인간과 동식물이 뒤섞인 생물체들은 기묘한 의식을 치르거나 제멋대로의 유희를 벌이는 듯 보인다. 그녀는 작품이 명확하게 분석되기보다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는데, 이처럼 마음을 내맡기고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이 낯설고 희한한 세계는 창조적인 공상의 여정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Bird Pong’(1949), 이미지 출처 – 링크
‘The Temptation of St. Anthony’(1974), 이미지 출처 – 링크
‘Les Distractions de Dagobert’(1945), 이미지 출처 – 링크
‘Heavy breathing’(1952), 이미지 출처 – 링크

리어노라가 온전히 자신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기까지는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7년 영국 랭커셔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가 처음 마주한 속박은 억압된 집안 환경이었다. 모든 행동이 감시받는 집을 감옥처럼 여기며 답답한 유년기를 보내던 그녀는 아일랜드인 외할머니와 보모가 들려주는 기이한 설화를 들으면서 자신만의 환상 세계를 키워나간다. 전통적 교육에도 끊임없이 반항하였기에 수도원 학교에서 퇴학당하기를 반복한다. 부모는 딸의 결혼을 통해 집안의 위신을 높이고자 했는데 그 시기가 점차 다가오자 열여덟 살의 리어노라는 집안과 연을 끊는다. 이렇게 재정적 지원에 작별을 고하는 대신 오래 갈망해온 자유를 택하여 런던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The Debutante and Other Stories’(2017), 이미지 출처 – 링크

자전적 단편 소설 <La Débutante>(데뷔탕트)에는 결혼 시장에서 대상화되는 것에 대한 작가의 불만이 유머러스하게 담겼다. 데뷔탕트는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젊은 여성을 뜻하는 단어다. 주인공 소녀는 동물원에서 친구가 된 하이에나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자신을 대신하여 사교계 데뷔 무도회에 보낸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초현실주의의 전위적인 활동은 어릴 적부터 권위에 반항하며 상상의 세계를 오가던 리어노라에겐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막스 에른스트의 런던 전시회를 계기로 그와 연인이 되어, 곧 함께 프랑스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초현실주의의 기수였던 에른스트와 함께였기에 리어노라는 바로 모임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녀의 소설과 그림은 금세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여성 멤버들을 동등한 예술가로 여기지 않고 뮤즈로 대상화시키는 한계를 보였다. 리어노라는 이런 제한적인 역할에 반발하며, 자신의 시각과 작품으로 고유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Self-Portrait: The Inn of the Dawn Horse’(1937~38), 이미지 출처 – 링크

자화상에서 리어노라가 주문을 걸듯 가리키는 하이에나는 그녀 스스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여성성의 원시적이고 거친 면을 보여주는 동물과의 동일시는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이 규정한 뮤즈의 영역인 팜므 앙팡(femme enfant, 아이 같은 여인)에 반발하고 그 역할에 도전하는 팜므 소르시에르(femme sorcière)로서의 그녀의 힘을 드러낸다.

파리의 생활을 뒤로하고, 리어노라와 에른스트는 단둘이 프랑스 남부의 시골마을 생마르탱다르데슈로 향한다. 그녀가 천국과 같았다고 회상했던, 작은 농가에서 창작을 하던 나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짧게 끝나고 만다. 독일 국적의 에른스트가 나치에 의해 군 수용소에 억류되자, 그녀는 타국에 홀로 고립된 상황에서 정신착란을 겪는다. 가족들이 강제로 입원시킨 정신병원에서 화학적 충격요법을 받고 거의 죽을 뻔한 리어노라는 해외로 탈출하기 위해 멕시코 대사인 친구 레나토 르두크와 정략결혼을 한다. 이후 뉴욕을 거쳐 망명 중인 초현실주의자들과 다시 교류하다가 남편과 함께 멕시코로 떠난다.

‘Down Below’(1937), 이미지 출처 - 링크

가족에 의해 스페인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던 경험을 기록한 회고록. 표지의 그림 <Crookhey Hall>(1986)에 묘사된 고딕풍 저택은 그녀가 억압된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로, 평생 여러 작품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의 리어노라(1942) © Münchner Stadtmuseum, Sammlung Fotografie, Archiv Landshoff, 이미지 출처 – 링크
뉴욕 망명 예술가들의 전시회 기념사진(c.1942), 앞줄 왼쪽부터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 리어노라 캐링턴, 프레데릭 존 키슬러, 쿠르트 셀리그만, 둘째 줄, 막스 에른스트, 아메데 오장팡, 앙드레 브르통, 페르낭 레제, 베레니스 애벗, 셋째줄, 지미 에른스트, 페기 구겐하임, 존 페런, 마르셀 뒤샹, 피에트 몬드리안, 이미지 출처 – 링크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멕시코는 국경을 개방하여 수많은 유럽 난민을 환영했고,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향한 멕시코시티는 리어노라가 창작 활동을 꽃피우는 환경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프리다 칼로, 옥타비오 파스와 교류하기도 했으며 뱅자맹 페레, 카티 호르나와 같은 망명 예술가들과 조우하며 멕시코시티에서 활기찬 예술 공동체를 구축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레메디오스 바로와 강렬한 우정을 나누고 예술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였다. 둘은 신비주의에 대한 생각을 교류하며 장난기 넘치는 놀이들을 벌였다. 멕시코 시장의 허브를 이용해 마법의 물약을 만들고 점성술을 탐구하는 등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며 함께 활발한 창작을 이어간다.

‘The House Opposite’(1945), 그림 일부, 이미지 출처 – 링크
‘The Giantess / The Guardian of the Egg’(거인 여자 / 알의 수호자, 1947), 이미지 출처 – 링크

리어노라는 뛰어난 지능과 변신 능력을 갖춘 아일랜드-켈트 전설 속 여신 다난(Danann)의 이야기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The Hierophant’(교황, ca. 1955) , 이미지 출처 – 링크

리어노라가 만든 자신만의 타로 팩 중에서. 그녀는 다양한 문화의 신비로운 전통과 상징을 자신의 예술 및 문학 작품에 통합했다. 그녀가 평생 동안 탐구한 신비주의에는 티베트 불교, 카발라,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마법, 켈트 신화, 요술, 점성술 등이 있었다.

리어노라는 헝가리 출신의 사진기자 에메리코 와이즈와 재혼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가사 노동, 육아와 함께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바쁜 생활에 그녀는 여성들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정을 돌보는 일을 스스로의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활동으로 전복하였다. 그녀는 멕시코의 음식과 부엌에서 발견한 치유력과 연금술적인 매력에 영감을 받아 요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그릴 때 신화적 의식에 대한 상징을 담아서 가정적인 일상을 신성한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부엌, 육아 공간, 화실이 뒤섞여 생활과 창작이 한데 이뤄진 그녀의 작업실은 그림 안팎의 여인들이 권위와 힘을 부여받는 장소가 된다.

‘Grandmother Moorhead’s Aromatic Kitchen’(1975), 이미지 출처 - 링크
‘AB EO, QUOD’(1956), 이미지 출처 – 링크
‘The Old Maids’(1947), 이미지 출처 – 링크

예상치 못한 새로움을 선사하는 리어노라의 창조력은 문학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녀가 서른세 살의 나이로 완성한 소설 <귀나팔>의 주인공 메리언 레더비는 아흔두 살의 노인이고, 그녀가 강제로 양로원에 보내지는 사건을 통해 모험이 시작된다. 레메디오스 바로를 모델로 삼은 엉뚱하고 씩씩한 친구 카르멜라, 그리고 양로원의 개성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 메리언은 지구의 종말 앞에서 서로를 도우며 위기를 헤쳐나간다. 노인과 비인간이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이 소설은 인간 중심적, 연령 차별주의적인 사고에 명랑하게 반기를 든다.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메리언에게서 리어노라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귀나팔> © 워크룸프레스, 이미지 출처 - 링크
<귀나팔>의 삽화, 이미지 출처 – 링크

양로원을 억압적으로 운영하는 갬비트 박사와 잠든 척하며 귀나팔로 그의 대화를 엿듣는 주인공 메리언. 이그잭트 체인지에서 펴낸 영어 판본(1996), 이를 옮긴 워크룸 프레스의 한국어 판본(2022)에는 리어노라의 둘째 아들인 미술가 파블로 바이스 캐링턴의 삽화가 실려 있다.

<귀나팔>의 삽화. 양로원의 거주 시설들은 이집트 미라, 장화, 케이크처럼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링크

조각, 인형, 태피스트리를 만들고 연극을 창작하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력으로 리어노라는 스스로의 예술 세계를 풍부하게 가꾸었으며, 나아가 멕시코 예술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멕시코의 토착 신화가 자신의 아일랜드-켈트 배경과 공명한다고 느끼고 이를 통합한 그림을 다수 그렸다. 또한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의 벽화를 의뢰받자, 이를 위해 고대 마야 유적지 치아파스에서 6개월을 보내며 마야 우주론 속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을 연구할 정도로 멕시코의 문화를 깊이 탐구하였다.

연극 <페넬로페>의 한 장면 (1957), 이미지 출처 – 링크

리어노라는 연극 <페넬로페>의 집필, 무대 및 의상 디자인을 맡았고, 친구이자 제자인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How Doth the Little Crocodile’(2000), 루이스 캐럴의 시 ‘어쩜 이리 작은 악어가’에서 영감을 받아 명명되었다, 이미지 출처 – 링크
‘El mundo mágico de los mayas’(마야의 마법적인 세계)(1963),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을 위해 제작한 벽화, 이미지 출처 – 링크
‘Mujeres Conciencia’ (여성 인식, 1972), 리어노라가 디자인한 멕시코 여성 해방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링크

2011년 아흔넷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멕시코시티에서 60년 이상 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친 그녀는 멕시코에서 자국의 예술가로 여겨지며 존경받았다. 선구안으로 빚어진 강렬한 작품들은 계속해서 많은 창작자들에게 소환되며 창조적 영감이 되고 있다. 놀라운 힘과 심오한 신비를 지닌 리어노라의 세계는 불가해함 속에 유유히 살아 움직인다.

<The medium of Leonora Carrington>(2022), 이미지 출처 – 링크

이 책은 리어노라를 만나기 위해 멕시코시티를 찾았던 예술가, 배우, 소설가 등 수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을 다루면서, 그녀가 어떻게 스스로 영향력있는 매체가 되었는지 조명한다.

‘Tilda Swinton for W Magazine’(2013, 왼쪽), ‘Tuesday, Leonora Carrington’(1987, 오른쪽), 배우 틸다 스윈튼과 사진작가 팀 워커가 리어노라의 그림을 재현하여 그녀에게 경의를 표한 사진 작업, 이미지 출처 – 링크
‘Tilda Swinton for W Magazine’(2013, 왼쪽), ‘Darvault, Leonora Carrington’(c. 1950, 오른쪽), 이미지 출처 – 링크
‘The Milk of Dreams’(꿈의 우유, 1950년대 작업), 이미지 출처 – 링크

2022년 제59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전시의 제목 ‘꿈의 우유’는 리어노라가 두 아이를 위해 쓰고 그린 신비하고 환상적인 그림책의 제목을 빌렸다. 큐레이터 세실리아 알레마니는 개인과 기술, 신체와 지구 사이의 연결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 시대에 인간의 정의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면서, 리어노라의 초현실적인 창조물들을 이 상상의 여행에 동반자로 제안한다.

아이들을 위해 파자마를 뜨는 여인, 원숭이를 닮은 기다란 존재, 이미지 출처 - 링크
‘딸기 푸딩에 빠진 독수리 이야기’, 이미지 출처 – 링크
Conditioner <Leonora>(2021)

LA의 인디 밴드 컨디셔너가 리어노라를 주제로 만든 싱글 앨범. 이들은 그녀의 작품들이 초월적인 영역에 접근하였다는 측면, 그리고 매우 현대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 감명을 받아서 이 곡을 만들었다.

 

참고 자료

Leonora Carrington <The Lost Surrealist>(BBC Four, 2017)
Susan L. Aberth <LEONORA CARRINGTON : SURREALISM, ALCHEMY AND ART>(Lund Humphrie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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