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주인공 일행인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의 사상 첫 전국대회 출전. 이들은 하필이면 2차전에 세계관 최강자 산왕공업고등학교 농구부를 맞닥뜨린다. 주인공이 꽤 이른 시점에 끝판왕을 마주한다는 설정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된 클리셰지만, 이 작품은 이와 같은 예상대로 끝판왕을 꺾은 후 전혀 예상 밖에 전체 이야기를 갑자기 종결해버림으로써 커다란 의미와 화제를 낳았다. 게다가 해당 에피소드는 이전까지 작품이 반복해온 꽤 괜찮은 스포츠물이자 재밌는 개그물로서의 정체성과 패턴을 고스란히 반복하지 않고, 훨씬 진지한 스포츠물로 진화했다는 점에서, 전국대회 이전까지의 에피소드와 달리 애니메이션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색다른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산왕전 에피소드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소년만화로서의 좋은 스토리에 앞서 명경기로서의 완벽한 서사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명경기라 함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 일컬어질 만큼 예측 불허의 수준 높고 팽팽한 접전이 이루어졌을 순간임을 되돌아보면, 산왕전은 역설적이게도 마치 있는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치밀한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이야기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전까지 꽤 점진적으로 성장하거나 혹은 성장을 멈추었던 주인공 캐릭터들은 이 경기 단 40분을 통해 몇 단계나 스텝 업 한다. 더는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채치수, 자신이 공을 소유한 공격권 상황에서 패스하는 선택지를 얻은 서태웅, 여전히 고질적인 체력 문제에도 교체 아웃 되지 않은 채 3점슛 신기록을 써 내려간 정대만, 이전까지 없던 점프슛과 좀 더 다채로워진 팀플레이를 장착하고, 공격 리바운드의 실전 감각을 익히며 경기 MVP급 활약을 펼친 강백호. 무엇보다 큰 점수 차이로 인해 경기 청중마저 승부가 끝났다고 예상할 만큼 포기 직전까지 몇 차례나 몰린 벼랑 끝에서 이들이 차례로 성장하는 과정이 절대 억지스럽지도, 우악스럽지도 않게 묘사된다.

많은 독자가 명장면으로 꼽는 순간이 있다. 강백호가 감독에게 영광의 시대가 언제였는지 물으며 자신은 ‘바로 지금’이라고 단호하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선수 생명이 끝날 지도 모르는 부상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반드시 경기를 뛰어야겠다는 강백호의 진심과 결의, 더 나아가 희생 정신까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이러한 순간은 경기 속에서 무수히 등장한다. 같은 팀 동료인에도 이전까지 경기장 밖은 물론 안에서도 으르렁거리다가 기어코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로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한 차례씩 주고받는 강백호와 서태웅, 각자의 존재와 필요를 인정하지만 상호 진심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겉으로 보이지 않았던 채치수와 정대만의 무심한 하이파이브, 마치 어린아이처럼 서로의 역할에 무한 신뢰를 보내는 모든 멤버들. 이 경기 속 주인공 5인방은 (물론 상대에 맞설 충분할 재능과 실력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온전한 실력을 뛰어넘는 패기와 승리를 위해 이전까지의 ‘나 자신’을 내려놓는 절실함으로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반란’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애니메이션 <THE FIRST SLAM DUNK>는 기존 만화에 섬세하게 그리지 못했던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주전 5인방 중 유일한 1인, 송태섭의 성장의 이면을 그린다. 이를 적절한 호흡과 공감대로 그리기 위해 (송태섭 캐릭터의 일종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단편 <피어스> 외에) 오리지널 만화책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았던 등장인물의 '농구 이외의 개인사'를 다뤘다. 다소 뻔한 신파 같지만 기존에 어렴풋이 인식되었던 '송태섭'이라는 캐릭터의 이중성, 이를테면 문제아 같지만 마냥 엇나가지 않고, 심리적으로 예민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강인한 특성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깊은 이해를 이끌어냈다.

작품의 종반, 작전 타임 시간에 안 감독이 주전 선수들에게 화이팅과 결의를 이끌어내며 선수들 하나하나 각자가 팀에 보탬을 준 요소들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강백호는 리바운드와 끈기, 서태웅은 폭발력과 승리를 향한 의지, 정대만은 지성과 3점슛으로 팀에 시너지를 더하고, 앞서 채치수와 권준호가 토대를 만들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송태섭에게는 스피드와 감성을 이야기한다. 끈기와 지성은 그렇다 치고, 스포츠 경기에 웬 감성인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애니메이션 전까지 원작을 보며 이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산왕과의 경기에서 송태섭은 유독 많은 턴오버(실책)를 기록했다. 정대만의 말도 안 되는 3점슛 성공률과 양 팀 통틀어 독보적인 득점, 절대적으로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빛났던 강백호 리바운드 개수에 비해 송태섭의 실질적인 기록은 초라했다. 산왕의 존 프레스 디펜스에 시달리며 (결국 스스로 극복하기는 했으나) 직접 가로채기를 당하거나 패스 미스로 공격권을 내줘 잃은 실점은 무수하다. 혼자서 득점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갖추지 못했기에 제한된 역할 기준으로 송태섭의 득실점 마진은 양 팀 통틀어 최하위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정대만의 3점슛으로 북산이 초반 승기를 잡아갈 때, 강백호의 공격 리바운드로 첫 추격의 불꽃을 살릴 때, 서태웅의 각성으로 양 팀 에이스가 맞붙는 국지전에서 북산이 더는 밀리지 않게 되었을 때, 주인공 일행이 승기를 가져오는 모든 상황의 기점에는 늘 송태섭이 있었다.

감성. 외부에 자극에 대한 내면의 반응을 일컫는 말이다. 국내든 일본 현지든 작품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건 늘 정대만과 강백호였지만, 사실 정대만과 강백호를 비롯해 서태웅이나 채치수처럼 원작에서 보다 주요 캐릭터에 가깝게 묘사된 캐릭터들은 타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분명 경기 안에서 이타적인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할 때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송태섭은 다르다. 스피드와 테크닉으로 돌파와 패스를 개인 능력으로 발휘하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포지션상 포인트가드로서, 동시에 유일하게 감성을 갖춘 인물로서 다른 이들의 상황과 분위기를 민감하고 빠르게 캐치해 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 경기의 첫 골과 마지막 골은 강백호가 기록했지만, 가장 많은 득점은 정대만이 기록했지만, 첫 골의 어시스트는 이명헌으로부터 뺏긴 공을 다시 가로채기 한 송태섭으로부터, 내내 끌려다니던 후반전의 첫 1점 차 추격을 이끈 정대만의 4점 플레이 어시스트 역시 송태섭의 패스로부터 출발했다.

다른 네 인물의 각성이, 내내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이들의 타인에 대한 인식, 의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송태섭의 각성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정반대의 방향성이야말로 이 작품 속 주인공으로서의 당위를 증명한다. 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에서는 기타 캐릭터, 이를테면 원작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던 다른 학교 선수들의 존재감이나 장면이 적잖이 삭제되었지만, 한 인물의 ‘감성’에 처음으로 주목하고 그것을 연출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적절한 각색이자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이미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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