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난해하게만 여겨졌던 현대미술을 향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다. 주말마다 도심 곳곳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는 이들이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다. 그 문턱을 낮춘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다양한 전시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규모 화랑과 아트페어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경하고 직접 구매하려는 수요가 크게 늘었다. 과거에는 미술품 보유가 상류사회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직접 발품을 팔아서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이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미술을 즐기는 방식을 탐구하는 책들도 덩달아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늘은 읽고 나면 당장 미술관으로 달려가고 싶어지는 미술책 세 권을 소개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보통 서양미술사를 학술서로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예술 감상 방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고 나면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 전혀 달리 보인다. 존 버거는 미술을 즐기는 데 있어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제일 먼저 불편해한다. 그가 보기에 대중은 가장 자유로워야 할 미술마저도 누군가의 가르침 아래에서 무척이나 부자유스럽게 학습해온 것이다. 그는 기존의 통념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미안을 재고하기를 바란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1972년에 이 책을 썼는데, 이후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난해한 미술에서 어떻게 맥락을 끄집어낼 수 있는지 살피는 데 주력한다. 대중은 이미지에서 어떤 느낌을 받지만, 그것을 텍스트로 정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전통적인 미술사 책을 보면 작품에서 교훈을 찾아내려는 강박을 엿볼 수 있다. 마치 감상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따분하게 대중을 오도한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미술이 기능할 때 예술은 시시해진다. 그래서 존 버거는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관계 사이의 화음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존 버거는 완전히 새롭고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방식의 텍스트 해석을 강조한다.

책의 후반부로 다가서면 복제 기술이 미술사에 끼친 영향을 점검하고, 나체화에 잠재된 여성이 대상화, 유럽 유화의 계급성, 매일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광고의 상품성과 예술의 관계까지 다루는 범위를 확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이 계급과 인종, 성차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데, 이는 현재 전 인류가 여전히 고민거리임을 생각해볼 때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얼마나 선험적인 책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도발적이면서도 선언적인 제목을 지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우리가 아는 예술이 과연 예술로 볼 수 있는지 질문하는 책이다. 처음 책을 펴보면 베르사유 궁전, 니케상 사진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미술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제작 당시에는 왕권의 강화, 토속 신앙과 같이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었던 물품을 근대에 들어서면서 문화라는 개념으로 차용했다는 논리 전개를 편다. 예를 들어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위해 시각적인 화려함을 추구했지만, 훗날 관광객이 된 우리는 이를 예술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우리가 무언가를 아무리 아름답고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해서 쉽게 미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술은 과연 무엇일까. 뒤샹, 피카소, 몬드리안, 폴록, 앤디 워홀은 미술을 하고 있을까. 저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에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쓸모없지만 아름다운 의미를 추구한 작가들의 활동은 예술로 불러 마땅하다.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미술에 대한 개념도 유효해졌다. 그래서 현대 예술의 특정이 집단성의 배제와 탈권위성인 것이다. 오직 작가 자신이 스스로 피워낸 예술적인 영감으로 무언가를 창작할 때 미술은 미술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유럽을 예로 들면서 군주제의 해체와 동시에 개인성이 발현되었고, 그때부터 미술이 존재했다고 얘기한다. 미술사에서 개개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자연스럽게 여성권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여성이 붓과 조각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수놓을 때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에도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목차를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미술에 대해 알고 있었던 오래된 편견을 깨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존 버거와 마찬가지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역시 편견에 사로잡힌 예술에서 감흥을 느끼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가 변신에서 적은 문장처럼 미술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트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디자인의 꼴>

디자인과 미술가는 모두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와 감각적인 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은 있다. 차이는 무엇일까. 예술은 미적인 어떤 조형물을 만드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며 디자인은 주어진 환경과 목적에 맞게 조형적으로 어떤 것을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구별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술이 그 자체로 의미를 뽑아내는 것과 달리 디자인은 인간의 쓰임과 함께할 때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이다. 아무리 예쁜 디자인도 별 의미 없이 만들어진 형태는 없으며, 그 형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당초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념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코카콜라 병을 들 수 있다. 코카콜라 병 디자인은 초기에 미적인 것과 용량의 조절, 그립감 등 많은 고려를 하여 탄생했지만, 현재는 현대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콜라 그 자체를 흡수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카메라의 어원은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오브스큐라(Camera obscura)’다. 그래서 카메라는 초기부터 방과 같이 사각 형태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카메라가 사각형이 될 이유가 없지만, 초기 형태를 유지하는 측면에서 카메라는 네모난 형태가 된 것이다. 현재는 스마트폰이 카메라를 내장함으로써 기존의 사각 형태의 카메라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디자인은 전적으로 기술 종속적이고 쉽게 변화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는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디자인의 꼴>의 부재는 디자인의 진화론이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디자인 역시 문화 유전자를 퍼뜨리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현대에 다다른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지난하지만, 그 과정에서 쓰임새가 없는 건 사라지고 살아남은 형태는 미세하게나마 변화를 겪었다. 이처럼 <디자인의 꼴>은 디자인의 시시콜콜한 미시사를 훑어 내려가면서 우리 주변을 감싼 디자인의 생태계를 탐구한다.

 

메인 이미지 영화 <내셔널 갤러리> 스틸

 

Writer

부지런히 보고 영화 리뷰와 서평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