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는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후 찰리 파커, 맥스 로치 등 비밥 스타들의 콤보와 함께 직업적인 뮤지션으로 나섰지만, 비밥 스타일의 빠른 연주 속도를 따라잡느라 애먹었고 마약 등 방탕한 생활에 빠져 들었다. 그는 나이 삼십에 들어서자 아예 뮤지션 생활을 그만두고, 하버드에서 학생을 가르치거나 음반사의 임원으로 전직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그를 다시 주목받는 뮤지션으로 돌려세운 계기가 바로 1955년의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이었다. 여기에서 셀로니어스 몽크를 비롯하여, 주트 심즈, 제리 멀리건, 코니 케이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과 올스타 재즈 콤보를 결성하여 명연주를 펼친 그는, 찬사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바라본 관객 중에는 CBS 산하 컬럼비아 레코드의 명 프로듀서 조지 아바키안(George Avakian)도 있었다. 이 날의 실황은 그로부터 2년 후 컬럼비아에서 낸 첫 앨범 <’Round About Midnight>(1957)에 수록되었다.

앨범 <’Round About Midnight>에 수록한 몽크 오리지널 ‘Round Midnight’

방탕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늘 돈이 부족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조지 아바키안은 4,000달러(현재 가치로 약 4만 달러)의 선금을 제시하고, 당시 프레스티지(Prestige)와 계약 중이던 그를 컬럼비아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미 계약되었던 조건들을 마무리하느라 그의 컬럼비아 합류는 시간이 걸렸다. 아바키안은 그에게 기존의 재즈 음악과는 다른 스타일을 권유했고, 기존 재즈 음악이 내키지 않던 그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다. 두 사람은 군터 슐러(Gunther Schuller)가 ‘서드 스트림’(Third Stream)이라 부른 오케스트라 편성의 음악을 하기로 하고 어레인저를 물색했는데, 마일스는 그 중에서 길 에반스(Gil Evans)를 고집했다. 10여 년 전 제리 멀리건 등과 함께 9인조(Nonet) 편성으로 일주일 동안 공연했을 때, 그는 피아니스트로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실황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이 바로 <Birth of the Cool>(1957)였는데, 이 앨범은 후일 모달 재즈(Modal Jazz)의 시초로 평가되었다.

앨범 <Miles Ahead>(1957)에 수록한 ‘The Maids of Cadiz’는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레오 들리브(Leo Delibes)의 작품이다.

길 에반스와 마일스 데이비스가 함께 작업한 다섯 장의 앨범 중, <Miles Ahead>(1957), <Porgy and Bess>(1959), <Sketches of Spain>(1960)을 3부작으로 묶어 클래식과 재즈 장르를 혼합한 서드 스트림(Third Stream) 장르의 명반으로 꼽는다. 맨 처음 나온 <Miles Ahead>는 10곡을 끊김없이 하나의 모음곡(Suite)으로 연결하여 모두 18명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마일스 데이비스의 플루겔혼(Flugelhorn) 솔로를 들을 수 있다. 펭귄 가이드는 이 음반에 대해 “Quiet Masterpiece”라 극찬한 바 있다. 두 번째 앨범 <Porgy and Bess>는 조지 거슈윈의 1935년 오페라가 다시 무대에 올라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던 시점에 출반되었다. 이 음반 역시 평론가들의 극찬과 함께 약 30만 장이나 판매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였다. 세 번째 <Sketches of Spain>에는 스페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게즈의 ‘Concierto de Aranjuez’를 위시하여 길 에반스가 편곡한 스페인 민요를 담았다. 이 앨범에는 “20세기 최고의 음악적 성과”라는 대단한 찬사가 이어졌고,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첫 그래미상의 영예를 안겼다.

앨범 <Porgy and Bess>(1959)에 수록한 ‘Summertime’

길 에반스는 비밥 재즈에서 벗어나 “재즈가 아닌 음악”(Non-Jazz)을 모색하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딱 맞는 음악적 동지였다. 두 사람의 음악은 클래식과 재즈를 합친 서드 스트림 음악에 이어 프리 재즈, 재즈 퓨전, 재즈 록 등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길 에번스는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협력 후에도 지미 헨드릭스,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스팅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과 폭넓게 협업하여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길 에반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협업은 3부작 이후에도 컬럼비아 레코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서 계속되었다. 평론가 빌 키르히너(Bill Kirchner)는 미국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세 파트너쉽으로 듀크 엘링턴과 빌리 스트레이혼, 프랭크 시나트라와 넬슨 리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와 길 에번스를 들기도 했다. 두 사람이 모두 생을 마감하자 여섯 장의 CD로 구성된 박스세트 <Miles Davis & Gil Evans: The Complete Columbia Studio Recordings>(1997)이 출반되었고, 그래미는 최고 히스토리 앨범상을 받아 두 사람의 콜라보를 추앙하였다.

앨범 <Sketches of Spain>(1960)에 수록한 16분 길이의 ‘Concierto de Aranju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