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 시리즈 <이어즈 앤 이어즈>(2019, HBO&BBC)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문장으로 글을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았음을 언급하며 시작하면 무난했을 테지만, 유명한 작품 이름을 빌려 맥심 밸드리를 소개하려니 내키지 않았다. 이토록 다채로운 예술 세계를 좁은 이미지로 덮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잠재력과 표현력이 묻힐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던가. 이제 맥심 밸드리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화제작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에 출연했음을 말해도 될 것 같다. 앞서 웰메이드 리미티드 시리즈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빅토르 고라야를 훌륭하게 소화하며 얼굴을 알린 바 있었다. 그렇다, 맥심 밸드리는 배우다. 그러나 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만들고, 녹음하고, 공연하고, 뮤직비디오를 감독한다.

배우의 작업물이 쌓이는 모양은 각자 다르다. 데뷔 무렵부터 한 감독이나 프로듀서와 꾸준히 함께하는 이도 있고, 다양한 독립/예술영화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이도 있다. 열한 살에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에 출연한 이후, 배우로서 맥심 밸드리의 커리어는 막힘없이 이어졌던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해를 “여기저기서 괴상한 연기 일을 하며 보냈다”는 그는 대학을 자퇴한 후 집에 돌아와 배달을 하거나 펍에서 일하며 종종 ‘알아봐 지기도’ 했다고 한다. “누군가 내게 ‘그러니까 당신은 그 이후로 연기에서 벗어난 거네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자존심에 있어 약간 힘든 일이었달까.” (<NME>, 이하 별도 표기하지 않은 인용 모두 출처 동일) 그러던 2016년, 장수 연속극 <홀리오크>에서 리암 도노반 역을 맡게 되고,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쇼에 안착시킨다.

2016-7년에 걸쳐 그가 등장한 에피소드는 80회 정도. 솝 오페라 치고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맥심 밸드리는 스스로 충분했다고 여긴 듯하다. “이걸 하며 어메이징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내가 오랫동안 할 일은 아님을 알았다”라고 그는 털어놓는다. Hollyoaks 유튜브 홍보용 영상에서 장난스러운 투로“리암은 멋지고, 맥심은 지루해요”라고 하거나 짓궂은 손짓으로 모자를 휙 날리는 모습을 보니, 이 끼를 한 캐릭터에 묶어 두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리암 도노반의 매력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중엔 <퀴어 애즈 포크>,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의 크리에이터 러셀 T. 데이비스도 있었다. 그는 맥심 밸드리를 자신의 다음 작품 <이어즈 앤 이어즈>에 캐스팅한다.

과연 데이비스의 안목은 탁월했다. 빅토르 고라야의 옷을 입은 맥심 밸드리는 능숙하고도 개성 있는 표현법으로 화면에 자리 잡았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러시아가 정권을 잡는다. (혹시 몰라 덧붙이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인 2019년에 공개된 작품이다.) 빅토르는 게이라는 까닭으로 ‘불법인간’이 될 위기에 처하고, 영국에 난민 신분으로 머무르며 주인공인 라이언스 가족과 엮이게 된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대니얼이 관리하는 임시 거주지. 당당하고 순수한 미소를 던지는 이 남자를 목격하는 순간 시청자는 대니얼과 함께 얼어버릴 가능성이 높은데, 아마도 작품의 의도다. 빅토르는 누구든 반할 만한 “아름다운 사람”(뮤리얼)으로 설정됐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물론 아름다웠지만, 핵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에 있었다. 꿰뚫어 보듯 상대를 곧게 응시하는 맑은 눈에는 늘 삶이 반짝였다.

<이어즈 앤 이어즈> 공식 클립

빅토르는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인물은 아니다. 이미 ‘인생의 비밀’을, 자신과 상대를 믿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 이어서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늘 세상에 대한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 그런 캐릭터성에 설득력을 부여한 것은 맥심 밸드리의 담백하면서 단순하지는 않은 표현법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힘을 빼 화면에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독특한 색을 입힌다. 그 와중 얼핏 비치는 상처나 불안, 대니얼에 대한 미안함 등을 놓치지 않고 대사에는 없는 그늘과 깊이를 드리운다. 배우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을 테다.

그렇게 맥심 밸드리는 내 마음 한 구석에 빅토르의 자리를 만들었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았다’. 이 정서는 여섯 살 때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던 배우 자신의 서사와도 닿아 있다.

“강한 러시아 억양을 지닌 채 런던으로 왔다. 학교에서 영국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 나는 국적성(nationality)들의 혼합물(hybrid)이다. 정형화된 틀에 들어맞았던 적이 없었다. 삶 내내 그것을 느꼈다. 그게 아마도 아웃사이더들과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연기하는 일에 끌리는 까닭일 것이다.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을 연기하는 것이 좋다, 왜냐면 항상,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을 느껴 왔으니까.” (맥심 밸드리, <NME>)

빅토르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4화의 엔딩과 함께 전환점을 맞는다. 쪽배를 타고 함께 영국으로 건너오던 중 대니얼은 익사한다. 파시스트들이 집권한 괴상한 세상이 두 사람이 바랐던 “지루한 삶”(빅토르)을 영영 앗아갔다. 이 전개는 사실 빅토르에게 가장 가혹했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살아남았음을 사죄하며 연인의 죽음을 전해야 했던 그는,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 보다 더한 것들을 감당해야 했다. 잠깐 생기를 잃은 뺨을 보며 ‘대니얼의 애인’이었던 그의 역할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불안했는데, 작품은 훌륭한 방향으로 서사를 틀며 과몰입한 내 걱정을 날려 보냈다. 남은 전개를 따라가며 시청자는 서구중심적 픽션의 전형적 표상(representation)을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맥심 밸드리는 대니얼의 빈자리를 얼굴에 간직한 채 빅토르다움을 유지했다.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연인을 기억하며 눈을 빛내는 빅토르는 눈물 나게 멋졌고, 맥심 밸드리의 비주류적 존재감은 그만큼 특별했다.

<이어즈 앤 이어즈> 스틸

그 특별함은 맥심 밸드리가 몰두하는 다른 예술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음악을 만들어 온 송라이터이자 보컬이다. ‘싱어송라이터’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까닭은 그가 목소리를 쓰는 방식이 싱잉에 한정돼 있지 않아서다. 배우로서 주로 메이저 방송사의 대규모 작품들에 참여해 온 그는, 뮤지션으로서는 완전히 독립적인 성격의 작업물을 내놓는다. 공개적으로 남아있는 첫 음악적 흔적은 “사이키델릭 팝콘”을 연주한다는 록 밴드 ‘Another Her’(어나더 허). 현재 들을 수 있는 곡은 ‘Nowhere Boy’와 ‘Hold Tight’ 단 둘 뿐임에도, 고유한 스타일이 감지된다.

‘Nowhere Boy’ 뮤직비디오

“I’m a nowhere boy, that’s all I got. 나는 노웨어 보이, 그게 내가 가진 전부.” (‘Nowhere Boy’)

유행을 타지 않는 멋을 지닌 풍부한 사이키델릭 그룹사운드에 호소력 있는 보컬이 섬세한 믹싱과 만나 귀를 가득 채운다. 가사에는 느긋한 아웃사이더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원 테이크로 촬영된 뮤직비디오 속, 화면을 장악한다기보단- 원래 제 것임을 알고 있는 듯 가지고 노는 맥심 밸드리. 아쉽게도 이들의 작업은 지속되지 않았지만, 맥심 밸드리와 음악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나는 매우 강박적이고, 세트에 있을 때는 하고 있는 것에 완전히 몰두한다. 그러나 세트에서 돌아오면, 스위치를 끄고 항상 내 기타에게로 끌려간다.” (맥심 밸드리, <NME>)

바쁜 와중에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니 놓을 수 없었던 그는 뉴질랜드에 머무르던 2021년 여름 프로젝트 그룹 Terra Twin(테라 트윈)을 시작하게 된다. 분위기에 접점이 있다 해도 어나더 허와는 방식도 결과물도 구분되는 활동이다. 테라 트윈의 음악에는 맥심 밸드리가 좋아한다는 “이상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이 묘한 중독성을 지닌 가사와 사운드의 조합으로 담겨 있다. ‘Eastern Boy’에서 그것이 모호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발현된다면 ‘I Don’t Know’에서는 보다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의 덩어리들로 터진다. 뮤직비디오는 또 얼마나 ‘이상’한지. 공연예술가(performer)로서의 재능은 본인이 “창작적 통제권”을 지닌 공연과 뮤직비디오에서 보다 자유롭고 독특한 모양으로 드러난다. 전에 이들이 낸 EP앨범에 관한 글에 “청자는 작품이 마련한 틈에 앉아 각자 느끼고 상상하게 된다. 여기서 ‘틈’은, 결여가 아닌 생략과 여백이다.”라고 적기도 했다.

‘I Don’t Know’ 뮤직비디오

“It’s chemical nothing and everything”(‘Eastern Boy’) 어쩌면 물리적인 형태를 이해하는 대신 음악과의 화학 작용을 통해 흡수해야 하는 곡들일지도 모르겠다. 해석 보다는 짐작 정도만 해 볼 수 있는 가사들이지만, “The eastern boy, no money and no family 동쪽의 소년,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Eastern Boy’)처럼, 군데군데에서 맥심 밸드리가 ‘Nowhere Boy’부터 담곤 했던 아웃사이더적 정서가 느껴진다.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굴리는 이 예술가의 ‘본체’는 영국식 악센트를 쓰지만 빅토르에겐 러시아식 악센트가 있었는데, 보컬에도 종종 그와 유사한 딜리버리가 얼핏 들렸던 듯도 하다.

테라 트윈의 스포티파이 계정에는 원래 “맥심 밸드리와 제임스 하비의 장거리 음악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소개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더 이상 ‘장거리 콜라보레이션’ 그룹이 아닌, 다섯 친구(Maxim Baldry, Jake Goodboy, Lewis Spear, Alex Wadstein, Joel McConkey)가 모인 밴드가 됐다. 맥심 밸드리의 말에 따르면 “무엇이든 아름다운 60, 70년대 사운드로 바꿀 수 있는 거장 천재 프로듀서”라는 제이크 굿보이는 어나더 허 시절부터 함께한 동료이기도 하다. 밴드로 재결성한 이들이 최근 낸 정식 데뷔 싱글 ‘I’m Coming Up (Again)’은 삶에 대한 감상을 시각화한 묘한 분위기의 곡이다. 담백하고 느긋한 리프, 후반부 고조되었다 가라앉으며 마무리되는 그룹사운드, 리듬 위주로 띄엄띄엄 뱉는 보컬은 ‘Eastern Boy’와 닮았다. 후렴과 절의 구분 없이 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가사 구성은 ‘I Don’t Know’와 비슷하다. 허나 앞서 낸 두 트랙에 비해 가사와 멜로디의 가닥이 보다 분명히 잡힌다. 곡과 청자 사이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특유의 틈은 여전하다. 테라 트윈이 연주하는 모호하고 환상적인 세계의 매력은 꽤나 중독적이다.

“All life is cream, that sits above you like a pile. Old beam! Show me the way. 모든 삶은 크림이야, 네 위에 가득 얹혀 있는. 오래된 광선이여! 내게 길을 보여주오.” (‘I’m Coming Up (Again)’)

‘I’m Coming Up (Again)’ 오디오

드라마 촬영 사이 비교적 덜 타이트한 스케줄로 이루어지는 작업이지만, 덜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맥심 밸드리는 테라 트윈을“내 록, 내가 지속적으로 할 것(constant), 자신을 쏟아부어 몰입할 수 있는, 창작적 통제권(creative control)을 쥐고 있는 일”이라고 수식한다. 이들은 현재 “공연을 뛰는(play gigs)” 중이고, 인용한 인터뷰에 따르면 EP 앨범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배우로서의 근황을 살피면, 맥심 밸드리는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 시즌2를 한창 촬영 중이다. J. R. R. 톨킨의 원작을 베이스로 하여 피터 잭슨의 삼부작 배경보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는 악명 높은 이실두르를 맡아 연기한다. 기존의 서사에서 그의 결정이 불러온 파국을 시청자도 배우도 이미 알고 있다. 결코 무난하게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을 테다. 그 “분투(struggle)” 끝에 맥심 밸드리는 삶의 의미와 자아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젊은이를 발견했다. “이실두르는 정말로 착한 아들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찾고 지금 이걸 왜 하는지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물론 TV쇼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 그들의 능력과 노력의 합이 늘 뜻한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작품이 원작 팬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조금은 더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왕의 길을 걸을 자의 내면을 탐구할 맥심 밸드리의 연기만이라도.

“배우라면 자신의 것을 해야 한다,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을 찢고 나와야 한다. (…….) 일종의 여행하는 방랑자(traveling vagabond)가 되어야 한다.” (맥심 밸드리, <NME>)

단순한 낙관이나 낭만화가 아닌, 현실을 충분히 인지하는 채로 지니는 현명한 자세다. 신중한 언어에 담긴 태도에 빅토르 고라야가 겹쳤다. 그가 지닌 인디적 에너지(‘independent’/ ‘indie’라는 단어에 드리워진 뉘앙스는 ‘독립적인’ 만으로는 담기 어렵다고 본다. 맥심에게는 그 폭이 있다.) 는 주류의 쇼에도 어떤 ‘틈’을, 비주류적 매력과 존재감을 부여했다.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서 혼자만의 리듬으로 움직이며 작품에 녹아들 수 있는 감각이 그에게는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대로 아름다운, 스스로가 ‘무엇’인지 앎으로 충분함을 깨달은 이의 멋과 여유를 지닌, 맥심 밸드리. 그는 배우, 감독, 뮤지션이고, 예술가다. 자유로운 이방인이다.

 

* 참고 인터뷰

2022.09.29. interview by. Nick Levine, <NME> 링크

 

Writer

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안 쓰지 못해 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픽션에 과몰입하고 듣던 음악을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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