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누군가는 자기계발서를 찾는다. 출근하다가 문득 내가 뭣 때문에 이리도 아등바등하는지 허탈해지면 철학책을 들춰 보기도 한다. 지리멸렬한 일상을 벗어나서 다른 세상에 접속하고 싶다면 문학에 칩거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처럼 꼭 필요한 것만 쏙쏙 빼서 당장 써먹는 목적성 독서는 유용하다. 하지만 이른바 교양서로 불리는 책은 딱히 목적이라고 할 것이 없어 읽기가 애매하다. 품위 있는 삶을 위해서 두루두루 알려고 책을 펴지만 쉽게 지치고 머리만 아파진다. 내 생각에 개중에 가장 멀리하게 되는 교양은 과학이다. 수학과 물리로 이루어진 자연과학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삶과 동떨어져서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다. 우주의 탄생과 은하계의 진화, 태양의 탄생과 죽음을 다룬 칼 세이건의 대중 과학책 코스모스는 걸작으로 불리지만, 정작 내 일상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카오스를 해소해내진 못했다. 우주를 떠돌던 먼지가 생명이 되는 과정은 신비로웠지만 빡빡한 일과 중에 마주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래도 마냥 멀리할 수는 없어서 서점을 거닐며 비교적 쉽게 쓴 과학책을 찾아 헤맨다. 오늘은 과학 언저리에서 쉽고 따듯하게 인간 삶의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교양서를 소개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친화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친화력을 본문에서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한 진화가 핵심이다. 자기가축화란 인위적 개입 없이 야생에서 살던 동물이 가축화 되는 과장에서 나타는 '행동 변화'와 '신체 변화'를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가축화 과정에서 협력과 공감 능력이 발달했다. 적자생존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저자는 모든 종의 진화 핵심을 '다정함'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개와 침팬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강아지가 침팬지보다 더 협력적 의사소통에 특화된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동물은 종의 ‘생존’에 핵심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능력을 진화시켜 왔는데, 침팬지와 달리 개는 ‘생존의 핵심’이 ‘사람과의 의사소통’이므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는 인간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개의 유전자는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침팬지는 인간과 가장 닮은 영장류로 불리지만, 점차 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침팬지와 달리 개는 집에 온 주인을 위해 애교를 부리면서 어떤 인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족이 되었다. 누군가의 협력 없이 살아남기 어려운 존재가 과연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가에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유전자 관점에서 볼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의 조상 격인 늑대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개들은 다정하게 진화해서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친화력으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인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인간은 공막이 하얀 유일한 영장류이며 눈의 형태도 아몬드 모양이어서 공막이 더 도드라지게끔 진화했다. 하얀 공막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하도록 설계되었고,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 맞춤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저자는 이를 광고형 눈으로 부르는데, 현대의 미의 기준이 왜 그렇게 크고 선명한 눈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은 또한 어려 보이는 외모는 개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리숙한 행동도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우리가 아는 생존자에 관한 통념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인간이 왜 그렇게 동안에 집착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자기 가축화를 통해 충분히 친화력을 강화한 인류는 왜 아직도 갈등에 신음할까? 그건 내 편인 공동체(가족, 회사, 민족, 종교 등)를 소중히 하는 만큼 그 밖에 선 존재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인력이 강해지면 그만큼 척력도 덩달아 강화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의 발달로 1인 가구가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다. 그만큼 접촉이 어려워지는 사회로 바뀌어 간다. 누군가의 속사정을 들어보고,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기회를 애써 찾아내지 않으면 친화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결론 대목에 이르면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유일한 방법으로 접촉을 거론한다. 의도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이 자주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유대감을 가질 때 불가피한 다툼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인류는 오직 접촉만으로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만큼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신경과학(neuroscience 또는 뇌신경과학)은 뇌를 포함한 모든 신경계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외부 환경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밝혀내는 데 중점을 둔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독특한 제목도 뇌 신경에 문제가 생긴 환자의 징후에서 따온 도서명이다. 환자는 돋보이는 예술 취향과 품격 넘치는 교양 그리고 누구보다 유머러스한 화법을 지닌 사람이지만, 뇌에 문제가 생기면서 아내를 모자로 인지해서 자꾸 아내를 향해 머리를 들이민다.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찬찬히 사정을 듣고 있노라면 엄연한 비극임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걸출한 의사 올리버 색스의 솜씨가 돋보인다. 병을 드라마틱하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환자가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묘안을 짜낸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뇌에 문제가 생긴 이들의 병증과 그들의 사연 그리고 흥미로운 치료과정을 다룬 책이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위엄을 지켜내려는 환자와 올리버 색스라는 위대한 의사가 나누는 대화를 여러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우리는 보통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미쳤다는 말로 오인한다. 뇌를 정신과 등치하면 곤란해진다. 뇌 신경에 문제가 있는 환장의 경우에도 혹시나 기록에 남을 것을 우려해서 의료보험을 사용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신병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으며, 환자는 어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제대로 된 치료를 꺼린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고 있으면 정신이라는 것이 결국은 뇌의 질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뇌 신경 부위에 관해 논하기 시작하면 상세하고 구체적인 해법이 나온다.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관장하는 것은 심장이 아닌 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 가까운 지인이 차갑고 냉담한 의사를 만나서 고생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진찰 과정에서 마음이 다쳐 낙담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환자와 가족들은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병든 환자는 의사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자가 누군가의 아픔을 돌볼 순 없다. 올리버 색스는 공감과 헤아림이 없는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이고 힘주어 말한다. 문학은 우선 듣고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올리버 색스는 환자의 말을 받아 적어서 치료에 활용했으며,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치료라는 것이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한 인간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올리버 색스는 세계적인 신경의학자라는 칭호 못지않게 다채로운 취미를 가진 생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다독가이면서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고 온 도시를 떠다니는 방랑자이자, 엄청난 근력을 자랑하는 파워리프터다. 무엇보다 온갖 분야를 오가는 집필 내역이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짐작게 한다. 그를 보면 어떤 분야든 경지에 다다르려면 두루두루 넓게 배워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전언을 떠올릴 수 있다. 가장 멀리 느껴지는 과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실무 영역에서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증명해낸 드문 사례다.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그가 임상 기록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희귀종이다. 누구나 귀찮다고 손사래 치는 생의 복잡함을, 그 지난한 관찰의 과정을 통해 올리버 색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의학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밝혀내는 데 힘을 보탰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작가는 성비불균형이 남녀 차이를 발생시켰다고 말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다수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더 열려있기에 안정 지향적인 경향이 있고, 남자는 특출나지 않으면 짝을 찾기 어려우니, 늘 경쟁에 뛰어들게끔 공격적으로 진화하였다고 설명한다. 반감이 들기도 하고 의구심이 가는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다. 하지만 이런 과단성이 <행복의 기원>의 장점이자 진화심리학의 매력이다. 쉽고 재미있는 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학문이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을 과학의 부분집합으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여전히 논란이 있다.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EP)은 인간의 심리를 진화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인데, 이를 과학적인 논증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은국 작가는 진화심리학 이론을 대중에게 쉽고 단순하게 소개하면서도, 과학적인 논증 과정이라는 소기의 목적까지 달성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단문 위주의 선명하고 강력한 책으로 대중이 과학과 인간 삶을 접목할 수 있게 도왔다.

<행복의 기원>은 행복하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아닌, 왜 인간이라는 존재는 행복을 좇고 행복하여지려고 발버둥 치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론과 실험을 끌어들여서 삶을 해부한 끝에, 인간의 행복은 반복이며 습관이고, 삶의 구성물이며 그 과정에 있음을 증명해낸다. 이는 구체적으로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이미지로 압축할 수 있다. 책의 몇 가지 이론을 소개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공작새의 꼬리처럼 짝짓기의 도구일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예술의 창의성마저 번식과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인간 행위의 대부분이 번식을 위한 노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면 인간이 진화에 보탬이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의의가 있고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는 곧 행복의 추구가 목적에 치우치면 무의미로 흩어짐을 알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반대의 예로, 실험용 쥐의 뇌파를 자극하여 쾌감 센서를 켜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식까지 내팽개치고 고통까지 무릅쓰며 오직 쾌감을 위해 투신했다. 이는 긍정적인 정서 경험으로 부를 수 있는 육체의 쾌감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목적을 저버린 의외의 결과다. 과정상의 잦은 쾌락은 행복과 직결할 수 있지만, 지나친 쾌의 추구는 되려 번식과는 멀어질 수 있다. 결국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과 정도가 삶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와 미를 향한 욕망은 의식적인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부른다. 이는 쾌락을 제한하여 어떤 이상적인 상을 쫓는 경우다. 개인마다 삶의 행복을 취하는 정도가 다 다르겠지만, 과정과 목표(의미)라는 좌표 위에서 어디쯤 서는가에 따라 행복의 가치도 저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보통 사회성이 높은 사람을 훌륭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직장인을 예로 들며, 사람 때문에 힘든 게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싫은 사람과도 잘 지내야 돈을 버니까. 그런 능동적인 인재가 사회성이 높아서 유능하다고 말들을 하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직장에서 동료를 피해 다니는 직원과 고역스럽다고 매일 같이 식사하고 회식마다 따라다니며 어울리는 두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유전적인 특질에 의한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외향적인 성향을 보인 이가 내향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타고나기로 혼자 있는 것보다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이가 행복할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고독을 중시하는 시대에 비교적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의 경우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행복도 타인의 인정을 받는 선에서 느끼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하며, 이런 타인 중심적인 사고관은 개인의 특질을 잠재우고 행복도 타인의 평가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말한다. 결국 행복에 있어 외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만의 기준을 정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인 셈이다.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 보면 가치 있는 삶과 행복한 삶은 다르다. 인간이 꼭 행복해야만 하는가도 의문이다. 자아실현을 위해 행복을 뒤로 유예하고 고통을 감내한다면 그건 의미 있는 삶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는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의미 있는 삶과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메인 이미지 © 르네 마그리트 ‘The Lovers’(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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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보고 영화 리뷰와 서평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