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쓸모가 있는 인생관 따위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세계관이니 세상의 원리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을 학자연하는 자의 인생 신조 정도로 오해하기 쉽다. 잘 쓴 철학책은 공통으로 한 인간을 지배하는 학문적 기초와 맞닿아 있다. 형이상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등 철학은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인간 존재를 설명해낸다. 그만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품이 들게 마련이다. 재테크나 처세술은 일상에 바로 도움을 주지만 철학을 이해하고 써먹으려면 연쇄적인 질문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은 철학을 쓸모 없게 느끼게 하는 어려운 책을 미뤄두고, 현실 문제에 천착해서 우리가 늘 고민하는 것들을 다룬 철학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중걸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극 중 인물을 통해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집착, 광기, 자기 파괴 등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사랑은 말해질 수 없을까? 텔레비전을 켜고 인스타그램 게시글만 봐도 사랑에 관한 무수한 말을 들을 수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사랑일 수 있도록>의 저자 조중걸의 말대로라면 그건 사랑과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움켜쥐면 스르륵 빠져나가는 초 경험적인 대상이다. 사랑뿐만 아니라 존경, 우정, 신뢰 등도 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직 사랑만큼은 더 강렬하게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사랑 안에 있노라면 말할 수 없어도 초월적인 뭔가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수많은 통념이 붙어 다니고, 정론이 없기에 약장수가 약을 팔듯 온갖 방언이 난무한다. 조중걸 작가는 자신의 학문적인 베이스를 바탕으로 사랑의 근사치를 설명한다.

조중걸은 여성의 사랑에는 배타성과 시간이 중시된다고 말한다. 생애에 생산할 수 있는 난자는 한정적이고 출산, 육아에 대한 소요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를 함께 부담해줄 수 있는 상대를 공들여 찾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성은 관계를 향한 헌신을 사랑과 함께 묶는다. 비슷한 원리로 여성은 지성적인 사람을 곧잘 이상형으로 내세우지만, 사실은 공부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경우가 잦다. 지성과 사회적 출세는 관련이 없지만, 학벌은 그의 성실성과 지속성, 궁극적으로 육아와 양육의 충실성을 어느 정도는 보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는 섹스와 애정 없이는 사랑을 지속하기 어렵다. 여성에게 애정은 섹스의 조건이지만, 남성에게는 독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가정 안에 머무르는 건 사랑과는 무관하다. “가족의 경우, 남성은 배우자에게 성적 매력이 사라져도 가족이라는 의무감에 머무른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법률이 가하는 구속과 심리적 편안함이 주는 안정감, 파국이 주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것이 가족이다.” 이는 사랑의 낭만과는 먼 얘기지만 존재를 향한 이해에는 걸맞다.

교양에 관해 언급하는 작가의 태도가 흥미롭다. 교양과 지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물질적인 충족과는 거리가 멀다. 교양은 장기적인 안목의 추구이지, 당장 아이를 키우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자는 교양을 추구하는 자를 배우자로 두는 것을 극구 말린다. 현실의 패배를 자초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교양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이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조건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교양은 사랑처럼 말해질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게 쌀독을 채워줄 리 없다. 우리는 사랑을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기에 사랑하는 대상마저도 객관적인 지표 이외의 것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꽤 위험한 선택이다. 상대의 물질적인 조건을 따지면 속물이라고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사랑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궤변에 가깝다.

저자 조중걸의 말대로라면 운명적인 만남은 없다. 사실 모든 게 우연이다. 사랑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단지 숙명으로 간주하는 우연이 있을 뿐이다. 왜 사람들은 운명과 필연에 열광할까? 인간은 왜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무수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데, 그것이 다 우연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설사 그럴 경우에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랑은 스르륵 빠져나간다. 어떤 이는 현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관계의 고통을 감내한다. 운명적인 첫 만남을 추억하며 현재를 견뎌낼 수 있다.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랑은 하나의 심적 경향에 불과하다. 즉, 의지의 산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을 말끔하게 정의해내면 대다수의 연인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을 때 수많은 인연을 포괄해낸다. 조중걸은 고심 끝에 사랑을 위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사랑은 정의할 수 없을지 모르나, 오직 사랑을 위한 태도를 가질 때 사랑은 각자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자신의 의지이다. 잘못된 선택이란 없는 것이다. 단지 잘못된 의지만 있을 뿐.

 

애덤 모턴 <잔혹함에 대하여>

우리는 악에 관해 말하기를 주저한다. 악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속이 불편한 일이라 손사래 친다. <잔혹함에 대하여>를 쓴 애덤 모턴은 악의 특징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 세 가지로 꼽는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악하지 않을 수 있고, 작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충분히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복잡하게 하는 건 대체로 선해 보였던 사람이 보이는 악한 행동, 무뢰한으로 보였던 이가 얼핏 펼치는 선한 면모일 것이다. 그런 이중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특질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단순화할 수 없게끔 만드는 요인이다.

저자 애덤 모턴은 이 책에서 악을 정의 내리려고 애쓴다. 그는 <잔혹함에 대하여>의 첫 문장으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의 한가운데 있다'라고 했다.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 악을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어떤 이를 악하다고 거론하는데 정말 그런 걸까? 일본에 히로시마 원폭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과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셰비치 중 누가 더 악할까? 역사는 밀로셰비치에게 악마라고 칭하지만, 트루먼은 오히려 전쟁을 종식한 영웅으로 꼽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따지고 보면 트루먼의 잘못이 크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핵을 투하했지만,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다른 비거주 구역에 투하할 수 있었음에도 히로시마를 택했다. 하지만 그가 악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악하다는 것은 인간을 격렬하게 뒤흔든다. 밀로셰비치는 이해 도달 범위를 초과해서 학살을 위한 학살을 감행했다. 사람들을 체육관에 넣고 총살했으며, 아무 데다 시체를 유기했다. 용서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했다. 악과 잘못은 어떤 의미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거는 최소한의 기대를 저버리는 상황에서 악은 번식한다.

그렇다면 악을 저지르는데 환경(외적 요인)은 어떤 영향을 가질까? 악은 본성인가 아니면 학습된 무언가인가. 흔히 유영철, 정남규 같은 연쇄살인마를 타고난 악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범죄심리학자는 그들의 어린 시절을 분석하며 원인을 짚어내기도 한다. 물론 원인이라는 건 복합적일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강조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악을 불식시킨다. 이는 예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도 귀결한다. 악이라는 것이 다스려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타인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려는 예술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자는 악을 쉽게 이미지화하는 행위를 경계한다. 누군가를 비인간화할 때 악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대로 구현해낸 예술은 마음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촉진한다.

책은 화해로 구두점을 찍는다. 복수는 등가 교환이 불가능하고,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모르지만 용서할 수 없어도 화해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 악의 프레임을 생산하는 무수한 프로파간다 몰이에 의연해져야 한다. 매사 넘겨짚기보다는 잔뜩 벼려서 생각할 줄 알아야 악과 잘못을 구분해낼 수 있다. 올바른 진실을 선별하고 누군가를 적대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꽤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인간이 존엄과 품위를 획득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건이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붉은색 표지를 한 페터 비에리 작가의 <자기 결정>은 몇 가지 어휘로 요약할 수 있다. 몰입, 구체화, 글쓰기, 언어, 의식화. 모두 밖으로 표출하는 외화 행위다. 말하지 않으면 생각은 사라지고, 생각이 듬성듬성하면 정체성도 희미해진다. 삶이라는 게 언어로 다듬어지지 않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스러지게 마련이다. 페터 비에리는 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표현하라고 말한다. 그는 철학자답지 않게 감정적이고 부정확한 묘사도 용인할 정도로 표현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금 말하는 자기 결정적 삶의 정확한 의미는 뭘까. 우선 '자기'의 기준이 뭔지가 중요할 것이다. 바로 답이 나오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 직업이 '자기'일까? 업이 내 결정을 좌우하는 근간이 될 수 있을까? 밥벌이 대신 좀 더 멋진 대답이 필요하다. 결국 나는 나이키 운동복에 거대한 백팩을 등에 이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노트북과 책을 가방이 터지라 욱여넣으며 카페에서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를 그리워하는 도시인의 모습. <자기결정>은 누군가의 취향이 그가 결정하는 삶의 척도가 된다고 말한다. 취향을 갈고닦는 것이야말로 삶을 구체화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이제 '자기'를 알았으니 '결정'으로 나아갈 순서다. 남들 다 하는 대로 취직하고 청약저축을 넣고 어른들이 보기에 괜찮다는 차를 타기는 했는데, 이건 모두 내 결정이었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타성이 없다고 할 순 없다. 저자는 독자를 공격하듯 책의 초반부에 '자아상'에 관한 서술을 한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페터 비에리는 정확한 자화상을 위해서 자신을 세분화하는 언어를 갖도록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린다." 문학을 읽는다는 건 어떤 과정일까? 흔히 하는 말처럼 문학을 통해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걸까? 내가 직접 파리나 뉴욕으로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책이나 읽으면서 만족하라는 걸까? 잔인한 말 같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소설은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고의 확장을 통해 내가 살 방도를 궁리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매우 현실적이고 간편한 도구다.

책의 후반부에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문화를 아는 것과 체험하는 건 구별해야 한다." 문화를 잘 이해해도 그것이 내 정체성을 이루지 않으면 헛방이다. 말 그대로 머리로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비겁한 태도다. 그건 심하게 말하면 삶의 격을 떨어뜨리는 게으름이다. 페터 비에리의 말처럼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의 문화를 표출해내야 한다. 요즘 흔히 쓰는 짧은 문자로도 정중하고 확실하게 내 의사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형식을 탓할 게 아니라 형식에 걸맞은 표현방식을 단련해서 내가 하는 결정에 당위를 건져 올려야 한다. 저자는 러시아 태생이지만 영어로 소설을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나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한 아일랜드인 사무엘 베케트 같은 작가들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교양을 접할 때 그중 어떤 것을 내면화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교양은 삶의 방식이 되며, 그 교양이 바로 문학이고, 예술이고, 사상이고, 또 삶의 가치관에 보탬이 될 인문학일 것이다.

 

메인 이미지 영화 <우리 선희> 스틸

 

Writer

부지런히 보고 영화 리뷰와 서평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