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그 매력을 잃지 않는 사물들은 곁에 남아서 소중한 추억을 오래 떠올리게 해준다.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가 생활에 밀접한 물건들을 만들며 고유한 미의식을 펼쳐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별한 일상복을 만들고자 1995년 텍스타일·패션 브랜드로 시작된 미나 페르호넨은 오리지널 디자인의 가구와 식기 컬렉션을 내놓고,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일상의 단면들에 단아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깃들도록, 그래서 결국 사람을 지탱하는 좋은 기억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정성이 만드는, 오래가는 아름다움
핀란드어로 미나는 나, 페르호넨은 나비라는 뜻이다. 옷과 한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공간을 짓고, 다채로운 나비의 날개를 두른 듯한 느낌을 옷에 담고 싶다는 소망이 브랜드의 이름에 담겨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함께 일하는 직원, 공장과 같이 성장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운영 방식 또한 꽃에서 꽃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비를 닮았다고 설명한다. 장인 정신으로 정성스럽고 느리게 만든 미나 페르호넨의 제품에서는 유행을 초월하는 특유의 멋이 흐른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삶과 일에 대한 그의 철학을 담은 책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에서 이 독특한 브랜드를 만들게 된 시작을 설명한다. 조부모님의 수입가구점에서 취급하던 마리메꼬의 텍스타일이 어릴 적부터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던 그는 패션을 공부하던 19살에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골동품 가게, 박물관, 헌책방을 다니며 그는 자신이 새것보다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생활양식과 문화에서 받은 영향은 일본의 소박한 미니멀리즘과 조화를 이루며 브랜드의 결에 쌓인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artek, Kvadrat, KLIPPAN과 같은 가구, 텍스타일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며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자연의 모티프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미나 페르호넨의 개성은 텍스타일을 만드는 독창적인 과정에서 시작된다. 매 시즌 10여 점씩 새롭게 선보이는 패턴들은 텍스타일의 질감과 움직임, 착용했을 때의 뉘앙스처럼 입체적인 고민이 담겨있다. 미나 페르호넨의 웹사이트의 ‘텍스타일 다이어리’ 카테고리에는 각 패턴을 만든 계기를 상세히 기록해두고 있어 디자이너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미나 페르호넨이 스스로를 기록하는 방법
최소 100년 동안 지속하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미나 페르호넨은 스스로의 궤적을 찬찬히 기록하는 데 공을 들인다. 컨셉 북, 비주얼 북, 인터뷰집과 같은 책으로 브랜드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을 단정하게 엮어낸다. 디자이너의 스케치와 제작 과정, 아틀리에와 공장의 모습을 담은 풍부한 비주얼을 통해 이들이 쌓아온 시간, 아이디어와 노력을 생생하게 공유한다.



브랜드의 25주년을 맞아 2020년 개최된 전시명은 ‘미나 페르호넨/미나가와 아키라 지속하다’. 전시의 핵심으로 강조한 컨셉 츠즈쿠(つづく)는 ‘계속되다’라는 뜻이다. 각 전시장의 이름은 열매, 숲, 바람, 싹, 뿌리, 씨, 토양, 하늘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졌는데, 순환하는 자연계를 본떠 미나 페르호넨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하면서 브랜드가 지닌 생명력을 보여준 것이다.




자유롭고 시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미나가와 아키라가 브랜드 밖의 개인으로서 창작하는 삽화에서는 텍스타일 디자인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일본 경제 신문의 연재소설 <숲에 갑시다>의 삽화와, 아사히 신문에서의 연재 칼럼 <일요일에 생각한다>의 삽화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엮어 <本日の絵>(오늘의 그림)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간소하고 담백한 그림이 자유롭고 기분 좋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의 원로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미나가와 아키라에게 그림책 협업을 제안하였다. 그림을 먼저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자, 예상치 못한 창작이 전개된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기존 그림과 다른 분위기의 작업을 받고 처음엔 놀랐지만, 이를 보며 하이쿠 형식으로 말을 엮는 형식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생물들과 즐거운 리듬이 어우러져서, 유아를 위한 독특한 판타지 그림책 <はいくないきもの>(하이쿠적인 생물)가 완성된다.



빛 알갱이처럼 짧은 생애를 사는 나비와 영원처럼 긴 생명을 지닌 연못의 이야기, <おいで、もんしろ蝶>(이리 와, 몬시로 나비야)는 일본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구도 나오코의 글에 미나가와 아키라가 그림을 그린 동화책이다. 모두에게 소중한 생명의 시간이 있다는 메시지와 간결하고 서정적인 나비 드로잉이 여운을 남기는 작업이다.


누군가 오래 간직할 기억을 만드는 정성. 이는 빠르게 트렌드가 바뀌는 시대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미나 페르호넨이라는 나무가 가지와 잎을 펼치고 작지만 선명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와 미나 페르호넨이 지속해나갈, 세대를 초월하고 영속하는 활동들이 기대된다. 우아하고 한결같은 나비의 날갯짓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