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편지로 서로의 안녕을 물었다. 기러기 생활을 하던 화가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60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버지니아 울프는 스스로 생을 마치기 직전 남편 레너드에게 “내 삶의 모든 행복은 당신 덕분이었다.” 말하는 편지를 남겼다.

편지는 사적이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이 특정돼 있다. 그에게만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틱틱 빠르게 친 타이핑보다 더 심사숙고한 언어를 적는다. 세상이 달라져도 편지는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지난 역사 혹은 문학에서 등장한 편지를 소개한다. 편지에 담긴 마음을 함께 살펴보자.

 

오스카 와일드, 심연에서 보내는 편지 <심연으로부터>

<심연으로부터> 표지, 이미지 출처 © 문학동네

‘행복한 왕자’를 쓴 극작가이자 예술과 아름다움을 좇던 예술인 오스카 와일드가 옥중에서 연인 더글라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다. 더글라스의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은 첫째 아들이 동성애 스캔들로 죽게 되자, 그 스캔들을 덮을 만한 더 큰 사회적 이슈를 만들기 위해 오스카 와일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더글라스는 와일드를 부추겼고, 결국 와일드는 동성 성추행 혐의로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는다. 와일드는 출소를 5개월 남겼을 때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의 허락 하에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당대 성공한 예술인으로서 누렸던 찬란했던 것은 지난날일 뿐 고된 노역을 해야 했던 옥중 생활은 그에게 심연과 같았다. 판자 침대에서 눈을 뜨고, 손가락 끝이 아픔에 겨워 멍멍해질 때까지 질긴 밧줄을 갈기갈기 쪼개 뱃밥을 만드는 작업을 마치고, 죽지 못해 먹는 음식을 먹는, 챗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사유였을 것이며, 그 사유는 자신이 감옥에 있게 된 원인이자 연인인 더글라스를 향한 일이 잦았다는 것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편지(1897), 이미지 출처 © the british library - 링크

원망, 사랑, 증오, 후회로 점철된 편지에는 심지어 둘의 싸움과 대화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아 편지를 읽다 보면 지독한 사랑의 현장에 떨어진 관객이 된 듯하다. 와일드의 전기를 쓴 비평가 리처드 엘먼은 이 글을 가리켜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하고 긴 러브레터 가운데 하나”(a love letter…One of the greatest, and the longest, ever written)라고 평한 바 있다. 나는 왜 당신을 사랑했으며, 당신은 얼마나 지독한가 곱씹으며 지난 사랑을 되돌아보는 오스카 와일드는 연인에 대한 원망과 삶에 대한 성찰, 예술에 대한 신념을 한없이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당신은 이런 말로 편지를 끝맺었지. “영광의 좌대 위에 올라서 있지 않은 당신은 조금도 흥미롭지 않아. 다음에 당신이 다시 병들면 난 즉시 당신을 떠날 거야.” 아! 이 얼마나 조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말인지! 상상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니! 어쩌다 심성이 이리도 야멸치고 이리도 천박해졌는지. 지금까지 거쳐온 여러 교도소의 끔찍하고 고독한 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그 말이 얼마나 수시로 내 기억을 괴롭혔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증오는 우리를 눈멀게 하지. 당신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사랑은 아주 멀리 떨어진 별에 쓰인 것도 읽을 수 있게 하지만, 증오는 당신을 철저히 눈멀게 해 담장으로 둘러싸인 옹색한 정원, 방탕함으로 꽃이 시들어버린 저속한 욕망의 정원 너머는 볼 수 없게 만들었지. 당신의 끔찍한 상상력 부족은 전적으로 당신 안에서 살았던 증오의 결과물이야. 증오는 이끼가 갯버들의 뿌리를 조금씩 갉아먹듯 교묘하고 조용하게 당신 본성을 갉아먹었지. 그 결과 당신 머릿속은 시답잖은 흥밋 거리들과 하찮은 목표들로 가득차게 된 거야.

모든 재판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재판이야. 모든 선고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듯이. 그리고 나는 세 번이나 재판을 받았지. 처음에는 증언대를 떠난 다음 체포되었지. 두 번째는 구치소로 끌려갔고, 세 번째는 2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지.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는 나를 위한 장소를 허락하지도 않고, 내게 내줄 수 있는 장소도 없어.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지. 부정하거나 공정한 사람 위로 똑같이 달콤한 비를 내려주는 자연은 바위들 사이에 내가 숨을 수 있는 틈과, 정적 속에서 방해받지 않고 울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계곡을 마련해놓을 거야. 그리고 밤하늘에 별들을 걸어놓아 내가 어둠 속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멀리까지 갈 수 있게 해주고, 내 발자국들 위로 바람을 불게 해 아무도 나를 쫓아와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또한 자연은 넘치는 물로 나를 깨끗이 씻겨주고, 씁쓸한 풀들로 내게 건강을 되돌려줄 거야.

오스카 와일드는 1987년 5월 19일 출소되었고, 그로부터 3년 6개월을 버텼다. 수도원에서 머물기를 원했지만 수도사들에게 거부당하고, 두 아들도 만나지 못하고, 영국인을 마주치면 손가락질 받으며 그렇게 표류하듯 여기저기 떠돌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운 풍경을 녹음한 시를 편지에 넣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네루다(왼쪽)와 마리오, 영화 <일 포스티노> 스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위대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시를 매개로 친해진 두 주인공은 시만큼 풍부한 세상과 감정을 넣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두 편의 편지를 소개한다.

백수나 다름없던 ‘마리오’는 작은 섬 ‘이슬라 네그라’에서 유일하게 편지를 받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일자리를 얻는다. 시인과 친해지며 마리오는 시를 배우고, 주점에서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네루다의 시를 인용해 속삭이며 사랑을 쟁취하고 이후 서로의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편지의 등장은 이때다.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어 마을을 떠나게 된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편지와 소포를 보낸다. 자신에게 우편이 왔다는 소식에 “모래사장을 박차고 나가 두 물건을 낚아챈” 마리오는 집에서 보낸 푸른 날들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진다며 이슬라 네그라의 모든 일을 이야기해달라는 편지를 읽는다. 함께 온 소포에는 마이크가 달린 정품 일제 소니 녹음기와 함께 편지의 추신이 담겨있었다.

자네에게 글 말고 뭔가를 보내주고 싶었어. 그래서 이 노래하는 조롱에 내 목소리를 담았지. 조롱이면서 새인 셈이지.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야. 하지만 마리오, 나 역시 부탁이 있네. 자네만이 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친구들은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내가 망령 든 우스꽝스러운 늙은이라고 생각할 테니.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다네. 바다가 아쉬워.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주게. 정원에 들어가서 종을 울리게. 먼저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가냘픈 소리를 녹음하게. 그리고 다음엔 큰 종 줄을 대여섯 번 잡아당기라고. 종, 나의 종! 바닷가 종루에 걸려 있는 종만큼 낭랑하게 들리는 말은 없지. 그다음에는 바윗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 주고. 밤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파리는 아름답지. 하지만 내겐 너무 큰 옷이라네. 게다가 여기는 겨울이라 밀가루를 흩날리는 풍차처럼 바람이 눈을 휘날리고 있어. 눈은 쌓이고 쌓여 내 몸으로 기어오르지. 나를 하얀 도포를 입은 서글픈 왕으로 만들어버려. 벌써 입까지 차올라 입술을 덮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네.

자네가 프랑스 음악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도록 1938년 음반에서 한 곡 녹음해 보내네. 파리 카르티에라탱의 한 중고 음반점에 처박혀 있는 걸 발견했다네. 젊었을 때 그 노래를 얼마나 불렀는지. 늘 이 음반을 구하고 싶었는데 뜻을 못 이뤘었지. 「기다리겠어요」란 노래인데 리나 케티가 불렀어. 가사에 ‘밤낮으로 기다리겠어요, 돌아오시기를 항상 기다리겠어요.’라는 부분이 있다네.

네루다(왼쪽)와 마리오, 영화 <일 포스티노> 스틸

마리오는 몇 달간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들어가거나 별들의 움직임을 녹음하려고 아둥바둥하기도 하며 공들인 작업을 끝냈다. 네루다는 파리의 집무실에서 이 편지를 듣는다. 듣는 편지만이 줄 수 있는 소식과 풍경이 있다.

하나, 둘, 셋. 화살표가 움직이나? 그래 움직이는군 (헛기침) 그리운 선생님, 선물과 편지 아주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편지만 보내셨어도 저희 가족 모두 행복했을 텐데요. 어쨌든 소니 녹음기는 아주 훌륭하고 흥미로워요. (중략) 그리고 조금 있다 아시게 되겠지만 깜짝 놀랄 소식이 있습니다. 벌써 궁금해 죽겠죠? 그렇다는 데 내기 걸죠. 그래도 테이프를 뒤로 돌리지 마시고 계속 들어주세요. 몇 시에 희소식을 아시게 될지 모르니, 귀중한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어쩜 이리도 삶이 요지경일까 하는 것이에요.
(중략)
지금부터는 원하시던 소리들입니다.
첫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 소리.
둘째, 제가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큰 종을 울리는 소리.
셋째, 이슬라 네그라 바윗가의 파도 소리.
넷째, 갈매기 울음소리.
다섯째, 벌집.
여섯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
그리고 일곱째,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 군. (갓 태어안 아기가 쩌렁쩌렁 우는 소리가 십 분쯤 지속된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인 이 부분을 영화에서는 또 다르게 풀어냈다. 마리오가 태어나서 처음 받는 편지조차 네루다의 비서가 보낸 사무적인 편지로 시작한다. 영화만큼은 고양감을 누릴 수 있게끔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베토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의 분신인 불멸의 연인이여”

요제프 카를 슈틸러, 베토벤의 초상화(1820년)

1827년 베토벤 사후 보내지 못한 편지 세 통이 발견됐다. 수취인과 연도 없이 날짜만 적혀 있었으며, 차례대로 ‘7월 6일 아침’ ‘저녁’ ‘7월 7일 아침’이다. “나의 천사이자 나의 전부이며 나의 분신인 그대.”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베토벤은 독신이었으나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엘리제를 위하여’, ‘월광 소나타’ 등 작품을 종종 당시 만나던 이에게 헌정하기도 하였기에 그의 연인은 때로 피헌정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편지에 담긴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란 오만하고 불손하고 괴팍한 베토벤에게는 꽤나 이례적인 것이어서 약 200년 동안 이 수취인에 대한 미스터리는 흥미로운 화제거리였다.

베토벤이 편지에서 상대방을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으로 불렀기에 많은 이들도 불멸의 연인으로 부르고 있다. 많은 것이 불분명한 이 편지에서 확실한 것은 몇 가지뿐이다. 하나, 둘의 사랑은 쌍방향이었다는 것. 베토벤이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절대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그대 외에는 그 무엇도 절대로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어요.” “당신의 사랑이 나를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또 일순간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에요.”라는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며 둘 모두 이를 인지하고 있다. 둘, 7월 6일 월요일 아침부터 7월 7일 화요일에 걸쳐 편지를 썼고, 7월 7일 베토벤은 보헤미아의 온천 휴양지인 테플리츠로, 이후에는 카를스바트로 갔다는 것. 편지가 쓰인 연도를 맞춰보자면 1812년이 가장 유력하다. 무기와 인간, 피그말리온으로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베토벤처럼 사랑에 빠져 백치 같은 연애편지를 썼지만, 대부분 돌려받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죽고 난 뒤에 작품 속에 넣기 위해 간직하고 있을 텐데. (중략) 좌우간 베토벤의 것보다 더 얼빠진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편지에 담긴 베토벤의 절절함, 조급함은 사랑에 뜨겁게 달궈진 마음이 아주 날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그 마음을 아예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쓴 7월 7일의 편지만 봐도 그렇다. 일어나자마자 전전긍긍 핸드폰 메신저 앱을 붙잡는 모습과 닮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갈 지의 선택권이 상대방에게 있어서 유독 베토벤의 문장이 행복과 두려움, 걱정이 섞인 채로 격렬하다는 평이 있다. 불멸의 연인 후보로 거론되는 세 명의 여인이 모두 유부녀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여실히 묻어나는 것이리라 추측한다.

베토벤의 편지, 이미지 출처 © Universal History Archive/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Though still in bed, my thoughts go out to you, my Immortal Beloved.
(중략)
Be calm - love me - today - yesterday.
What tearful longings for you - You - my life - my all - farewell.
Oh, continue to love me - never doubt the faithful heart of your beloved.
Ever thine.
Ever mine.
Ever ours.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머릿속에서는 온통 당신 생각뿐이에요, 불멸의 연인이여.
침착해요. 나를 사랑해 줘요. 오늘, 어제.
당신을 향한 이 갈망은 얼마나 눈물겨운지. 당신, 나의 삶, 나의 모든 것, 안녕.
아, 날 계속 사랑해 줘요. 당신을 사랑하는 이 충실한 마음을 절대 의심하지 마세요.
영원히 당신의.
영원히 나의.
영원히 우리의.
7월 7일 새벽.

영화 <불멸의 연인>은 이 편지를 토대로 비서 ‘안톤 쉰들러’가 유언장에 적힌 무명의 상속자를 찾기 위해 베토벤의 과거 연인들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을 줄거리로 한다. 아직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추측만 난무하기에 영화가 내놓는 그 대상이 정답은 아니다. 다만 영화 나름대로의 결말과 그 속에 녹아든 베토벤의 음악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메인 이미지 <일 포스티노>

 

Writer

좋아하는 것들을 쓴다. 좋아하는 이유를 열렬히 말하며 함께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